스토리1

노마드-동물되기

체 게바라 2006. 9. 12. 15:20

 

노마드-동물되기

 

천지는 어질지 않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
지식인은 어질지 않다
사람들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고나 할까?
텅 비어 있는데도 없어지지 않고
움직여서 더욱 나온다
말이 많으면 빨리 궁핍해지고
텅 빈 것을 지킴만도 못하다

 

왜, 우리는 “기관들 없는 몸”이 되거나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가 사유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착된 세계에서 벗어나 생성적 욕망과 생성적 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생산하는 욕망기계의 근원적 특성은 흐름이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흐름의 특성을 지닌 것이 물이나 바람인데, 물이나 바람이 흐르지 않고 고여있으면 썩는다. 이것은 물이나 바람의 특질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의 근원적인 특성이다. 아무리 훌륭하게 지은 집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서 여러 물건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집은 기본적인 수명보다도 더 빨리 무너진다. 나무도 수많은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또 다른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로 흘러 생성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사람의 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나의 손기계가 오직 먹는 기계만을 고집하고, 순간적으로 쓰는 기계, 던지는 기계, 만지는 기계, 집는 기계 등등이 되지 못하면 손기계는 고장이 나거나 죽게 된다. 따라서 손 기계는 흐름의 기관들 없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다양한 생성의 생명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떠한 물질의 이러한 흐름과 생성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기관들 없는 몸들이 내재성의 장에서 서로서로 맺는 관계맺기라고 말할 수 있다. 훌륭한 수영선수는 물 속에 들어가서 물이 된다. 그가 물이 되지 못하고 물에 저항할 때, 물은 그를 삼켜버린다. 이처럼 수영선수와 물이 만났을 때, 수영선수가 물이 되고자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물 또한 수영선수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수영선수가 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물이 수영선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만났을 때, 가장 이상적인 하나의 기관들 없는 몸과 또 다른 기관들 없는 몸이 “일대 일”로 관계를 맺는 연결적 관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연결적 만남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나”라는 허구적 주체의식이다. 그리고 “나”라는 허구적 주체의식은 “나”를 중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고, 그러한 규정이 근본적으로 허구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나”의 허구성을 발견하는 나르씨시즘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나르씨시즘의 문화가 서구 근대 자본주의이고, 또한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이 지니는 주요한 내용이다. 서구, 백인, 그리고 남성이라는 “나”라는 주체의 발견과 전지구적인 “나”의 팽창과 확산을 통하여 비서구, 유색인, 그리고 여성의 발견을 통하여 서구, 백인, 그리고 남성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의 허구성을 발견하는 과정이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고대 중국의 중국 중심적 주체인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근대의 서구 자본주의 기계가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시민정신, 공공성, 공평무사, 정의 등등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의 전제군주 기계는 중국, 한족, 남성 중심의 공공성(仁), 정의(義), 시민정신(禮)을 만들어 기존 사회체를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다. 노자의 노마돌로지는 이것을 간파하고 있다.

 

생산하는 욕망을 가두어 두고 있는 사회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만물을 가두어 두고 있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 사회체가 개별적인 생산하는 욕망기계를 공공성이나 정의, 혹은 시민정신으로 길들이는 동시에 때로는 잔인한 폭력과 억압으로 사람의 목숨을 파리의 목숨보다도 쉽게 주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만물로 구성되어 있는 “천지”도 태풍, 지진, 가뭄 등등으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산산조각으로 흩날려 버린다. 따라서 “천지는 어질다”라는 말은 단지 자연 만물의 중심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인간중심으로 천지를 받아들여 마치 천지를 대행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전제군주 기계나 그 대리인으로 작동하는 국가철학적 지식인을 “어질다”라고 허구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관념일 뿐이다. “어질다”라는 말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1”과 “2”의 관계에서 “2”라는 노예와 여성이 주인과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천지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체 내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간파하고 있는 노마드적인 “지식인” 또한 “어질지 않다”. “지식인” 또한 사회체의 구성원이므로 지식인의 “하고자”하는 욕망은 그 사회체 속에서 규정되는 “기관들로 가득찬 몸”이다. 따라서 “하지 않음”의 욕망으로 나아갈 때, 성인은 천지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기관들 없는 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기관들 없는 몸의 상태에서 지식인은 자연의 천지와 마찬가지로 “지식인은 어질지 않다/ 사람들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가 될 수 있다. 전제군주, 혹은 전제군주를 대행하고 있는 국가철학적 지식인은 스스로 “어질다”거나, 혹은 “어질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 강요는 국가철학적 지식이 만드는 허구적 환상이다. 그리고 그들의 “어질다”거나 “어질어야만 한다”의 대상인 일반사람들 또한 전제군주나 현인이 “어질다”거나 “어질어야만 한다”는 강요된 환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강요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몫이다. 그들의 욕망기계가 순수한 흐름의 상태에 도달해서 마침내 기관들 없는 몸으로 나아갈 때, 전제군주나 현인이 “어질다”거나 “어질어야만 한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생성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이들 대다수 민중의 기관들 없는 몸이 지니는 미래적 생성의 모델이지, 전제군주나 현인처럼 그들을 이끌어 가는 주인의 역할이 아니다.

 

새로운 생성은 하나의 기관들 없는 몸과 또 다른 기관들 없는 몸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의 근원적 모델은 수컷과 암컷, 즉 “하늘과 땅”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고나 할까?/ 텅 비어 있는데도 없어지지 않고/ 움직여서 더욱 나온다”처럼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가 만드는 “풀무”와 같은 작용이다. “풀무”의 작용이란 “하늘과 땅”이라는 “하나의 수컷과 하나의 암컷 사이에, 바람이 몰고와서 뿌리 주변에 리좀을 형성하고, 오직 생산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되기의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둘의 개별적 존재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많은 존재들이 지나갈”(『천개의 고원』, 15) 수 있는 길을 만든다. “풀무”와 같은 암컷과 수컷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작용을 들뢰즈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불지워진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동물 되기”라고 말한다.

 

동물되기는 아주 다양하다. 첫째로, 고양이와 개, 혹은 닭 되기가 있다. 그러나 고양이와 개, 그리고 닭은 기관들 없는 몸으로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다. 고양이와 개, 그리고 닭은 사람들이 사육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몸이 지니고 있는 생성의 강렬도를 잃어버렸다. 사육이란 항상 대상이 지니고 있는 생성의 속도를 빼앗는 것이다. 따라서 고양이, 개, 그리고 닭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노예의 특성을 지니게 된 동물들이다. 따라서 고양이와 개를 좋아하여 고양이와 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인-노예의 관계에서 사람을 주인으로 흠모하고 사랑하는 바보들과 백치들이다. 그들은 문턱이 없는 사방이 막힌 방에서 자기만의 오르가즘으로 아우성치고, 사람이 된 슬픔과 분노를 이야기하고, 그래서 고양이나 개가 아닌 호랑이나 늑대로 부활할 것을 꿈꾸며, 엄마와 아빠 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이들은 마침내, 혼자 껄껄껄 웃는 법을 배워서 백치가 된다.

 

이와는 달리 신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나 곰, 혹은 독수리나 말 되기가 있다. 이러한 동물의 신화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독재자들이다. 그들은 호랑이에게 명령하여 호랑이 가족을 만들고, 곰에게 명령하여 곰 가족을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호랑이나 곰이 되어 명령을 전달받거나 전달하면서 호랑이와 곰이라는 야수(beast)의 원형과 그 야수라는 원형의 명령을 따르는 미녀라는 모델을 만들어 신화라는 커다란 서술체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체계를 서로서로 반복하면서 언어를 통하여 자신도 명령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측면에서 신화는 언어를 통하여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부활한다. 언어를 통하여 “길을 길이라고 하”거나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그것은 신화가 되어 언어라는 하나의 명령체계 속으로 들어간다.

 

기관들 없는 몸들이 상호 작용하는 “풀무”와 같은 관계를 만드는 진정한 동물 되기는 바다의 물고기 때, 초원의 가축 떼, 그리고 하늘의 기러기 떼처럼 웃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보다듬고, 애무하거나 매료시키거나, 혹은 감염시키거나 감염되어 헤엄치고, 뛰고, 날아오르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서로서로의 특이성을 잃어버리고 전혀 인식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무리가 되는 것이다. 무리가 되어서 비로소 노마드는 영토를 지니고 있는 정착민이 아니라 노마드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들뢰즈가 말하는 동물 되기란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 되기를 행하거나, 호랑이나 곰처럼 신화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무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무리들이 지나간 자리에 “풀무”의 작용처럼 작은 파도가 일고, 폭풍우나 태풍이 불어, 마침내 천지가 소용돌이를 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풀무”와 같은 작용을 노자는 “텅 비어 있는데도 없어지지 않고/ 움직여서 더욱 나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리 속에서 하나의 특별한 변종적 존재가 생겨난다. 무리 속에서 마치 “군중 속의 고독”처럼 “무리와 고독한 자”를 구별하는 하나의 기러기와 또 다른 기러기, 하나의 물고기와 또 다른 물고기, 혹은 하나의 말과 또 다른 말이 등장하여 무리들의 결연관계나 동맹관계를 맺을 준비를 한다. 이러한 결연관계나 동맹관계를 맺는 자가 지식인이며 예술가이다. 전제군주 기계의 시대에 이들은 마법사이며 성자였다. 그들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추거나, 혹은 그림을 그리거나 이야기를 만들어서 동물 되기의 즐거움을 통하여 무리들 전체를 감염시킨다. 그러나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 헤엄치거나 뛰고 날아오르지 않고 어떤 노래나 춤, 혹은 그림이나 이야기 속에 머물러 개나 고양이, 혹은 신화 속의 호랑이나 곰을 좋아하면 그들도 역시 바보나 독재자가 된다. 따라서 “말이 많으면 빨리 궁핍해지고/ 텅 빈 것을 지킴만도 못하다”처럼 결연관계나 동맹관계의 생산물인 노래나 춤, 혹은 그림이나 이야기로부터 떠나지 않고, 머물러서 그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면, 기관들 없는 몸의 상태, 즉 “텅 빈 것을 지킴만도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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