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내재성의 장, 혹은 기관들 없는 몸
길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용도는 항상 가득차 있다
길은 깊고 조용하여
만물의 뿌리와 같다
만물의 뾰족함을 꺽고
만물의 끊어짐을 풀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더러움에 동화한다
깊어서 보이지 않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그러나 천제(天帝)보다 먼저 생겼다
나무와 풀, 흐르는 물과 바람, 그리고 들판의 동물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이 대지의 구성요소들이듯이 인간도 대지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대지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노마드적 존재들은 대지와 더불어 끊임없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마드의 욕망은 탈영토화의 욕망인 동시에 재영토화의 욕망이다. 그러나 노마드의 근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인 무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사회체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지와 더불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 속에 있었던 개인의 욕망은 곧 사회적 욕망이 되고, 사회적 욕망은 곧 개인의 욕망이 된다. 사회체는 대지를 영토화하고, 대지의 구성요소였던 개인은 이제 사회의 구성요소가 된다. 개인과 사회는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는다. 고대 국가철학이 지니고 있는 이상/현실이나 도/덕의 이분법은 몸(體)/정신(用)이나 이(理)/기(氣)의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개인/사회의 이분법은 서구 근대사회가 만들어 놓은 허구적 이상이다.
그러나 서구의 르네상스는 전제군주 기계라는 사회체에 고착되어 있었던 개인의 노마드적 욕망이 탈영토화하여 기관들 없는 몸이 되고자 했던 동시에 전제군주 기계라는 사회체제도 탈영토화 하여 기관들 없는 몸이 되기 시작했던 시대였다. 서구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적 신이라는 초월성과 동일성을 통하여 욕망을 통제했던 중세의 종교적 지배형식과 결합했던 서구의 국가철학은 정신/몸의 이분법을 통한 과학적 논리학과 결합하여 무한정으로 탈영토화하는 개인과 사회의 욕망을 재영토화하기 시작했다. 근대 국가철학이 지니고 있는 정신/몸의 이분법은 사회/개인의 이분법과 동시에 정신을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몸을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강요하면서 개인의 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이 영토화 한 생성적 욕망에 대한 억압과 통제로부터 탈영토화 하는 길은 정신을 통한 관념적 형이상학의 사유가 아니라 몸을 통한 유물론 형이상학의 사유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서구의 르네상스가 경험한 노마드적 상황과 노마돌로지에 대한 인식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이 경험한 노마드적 상황이나 노마돌로지와 유사한 것이다. 따라서 서구 르네상스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과 재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서구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노마돌로지와 유사한 특성들보다도 고대 중국의 노마드적 상황이나 노마돌로지와 유사한 특성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고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명으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지중해와 반도의 해안지역이라는 새로운 대지에 세운 지리적으로 새로운 영토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경험은 바다와 사막을 가로지르는 개별적 욕망의 선분에 따라 고대 그리스라는 여러 도시들 위에 그들 나름의 민주주의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문명 이전에 고대 그리스는 대지 그 자체였고, 그 대지를 영토화한 그 어떤 사회체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노마드적 상황이나 노마돌로지는 이와 다르다. 고대 중국인들은 지리적으로 새로운 대지에 새로운 영토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원시토지 기계라는 사회체제를 탈영토화시켜 전제군주 기계라는 전혀 다른 사회체제로 재영토화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서구 르네쌍스를 통하여 중세의 전제군주 기계라는 사회체제가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근대 자본주의 기계라는 전혀 다른 사회체제로 재영토화하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고대 중국과 서구 근대의 서로 다른 사회체의 서로 다른 재영토화 과정은 정신/몸의 이분법을 통하여 몸이 지니고 있는 생성적 욕망을 정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요소에 기입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유사성을 지닌다.
노자는 이러한 고대 중국의 원시영토기계가 전제군주기계로 재영토화하는 과정에서 탈주한 노마돌로지의 철학자이다. 전제군주기계의 사회체제는 원시영토기계의 완전한 기계론적 유물론으로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버린 사회와는 달리 노마드의 생산하는 욕망기계를 전제군주기계와 “현자”라는 국가철학적 지식인이라는 추상기계에 기입하도록 강요하는 지배의 코드체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전제군주 기계라는 사회체제 속에서 탈주의 길이나 생성의 길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노마돌로지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국가철학적 지식에 대항하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노마돌로지의 지식 속에서 탈주나 생성의 길을 사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어진 몸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현인”이라는 국가철학적 지식인에 의하여 매개되고 있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괴물처럼 거대해진 사회체제 속에서 개별적인 노마드들은 전제군주, 현인, 농민, 군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기관화되어 거대한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그 어떤 개별적 기관들로 인식하고 보여지도록 국가철학에 의하여 강요받고 지시받는다.
그러나 노마드의 몸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는 기관들 없는 몸이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기관들 없는 몸으로 보지 않고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기관들로 가득찬 몸으로 고착되어 현인, 군인, 남자 등등을 ‘나’라는 주체로 오인하는 순간, 그 몸은 사회체제의 “기관들로 가득 찬 몸”이 되어 욕망기계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연접적 관계로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어 버린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체제가 개별적인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관들로 가득 찬 몸”인 동시에 그 기관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관들 없는 몸”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기관들로 가득 찬 몸”인 동시에 “기관들 없는 몸”이기도 하다. 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기관들은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상호 만남의 관계에 의하여 변화하고 생성하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기관들도 상호 만남의 관계에 의하여 변화하고 생성하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몸을 사유하는 방식은 사회체 내에서 기관화된 “기관들로 가득 찬 몸”과 물질의 근원적인 생성의 조건인 “기관들 없는 몸”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몸(體)과 용도(用)의 관계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대지를 무한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 속에 있는 내재성의 장으로 인식하지 않고 기관들로 가득 찬 사회체제나 그 기관들의 영토로 오인하는 순간, 대지는 탈주의 길이나 선분을 완전히 상실한 감옥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기관들 없는 몸”이나 대지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은 각각의 개별적 몸이 맺고 있는 관계, 즉 그 몸과 맺어지는 외재적 대지의 조건에 따라서 서로서로 다르다. 개별적인 몸의 상황에 따라서 서로서로 다르다는 것은 기관들 없는 몸과 내재성의 장이라는 대지가 지니고 있는 생성적 힘 이외에 그 어떤 공통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관들 없는 몸”이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각각의 개별적인 “길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용도는 항상 가득 차 있다”처럼, 어느 누가 “기관들 없는 몸”이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간 “길”의 의미 없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변화와 생성의 “용도”들이다. 그 용도는 “기관들 없는 몸”이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이전의 “기관들로 가득 찬 몸”이나 영토에 고착되어 있는 하나의 기관, 즉 변화와 생성이라는 무한수 “N”이라는 숫자에서 하나의 고착된 “1”이라는 숫자를 뺀 나머지 모두들 지칭하는 “N-1”을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최근의 중국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기관들 없는 몸”이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과 그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생성의 용도들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도시라는 문명의 영토 속에서 “기관들로 가득 찬 몸”으로 살고 있는 주인공은 어느 추운 겨울 날,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바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골 벽촌에 있는 고향집으로 간다. 영토적 사유와 기관들로 가득 찬 몸으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장례식을 마치고 도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주인공에게 어머니는 읍내에서 마을까지 죽은 자의 길을 따르는 전통적인 장례행렬을 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죽은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하여 주인공은 서서히 “기관들 없는 몸”이 되고, 도시의 영토로부터 벗어나 대지와 하나가 되는 내재성의 장을 사유하는 지식인으로 변화한다. “내재성의 장”과 “기관들 없는 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수십 년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맺은 생성적 만남의 생성물들을 향유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마을 사람들이 합류하고, 도시에 나간 아버지의 제자들이 찾아오고, 눈이 내리는 시골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장례행렬은 그 이후의 수많은 생성적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따라서 “내재성의 장”에 대한 사유와 “기관들 없는 몸”으로 나아가는 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길은 현존하는 사회체제 내부에 있은 “욕망 있음”과 근원적 생성의 “욕망 없음”의 사이에 있는 깊고 깊은 욕망의 심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길은 깊고 조용하여/ 만물”이 생성하는 “뿌리와 같”고, 이미 영토나 “기관들로 가득 찬 몸”에 의하여 고착된 “만물의 뾰족함을 (스스로) 꺽고/ 만물의 끊어짐을 (스스로) 풀고/ 빛을 (스스로) 부드럽게 하고/ 그 더러움에 (스스로) 동화”하는 길이다. 따라서 그 길은 "깊어서 보이지 않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마치 물이나 공기, 혹은 바람처럼 손으로 잡으면 어느새 빠져나가는 그런 물질"이다. 우리가 물이나 공기, 혹은 바람을 관념적인 추상성이나 신비적인 형이상학적 특성으로 파악하지 않는 것처럼 “기관들 없는 몸”이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 또한 관념적인 추상성이나 추상성이나 신비적인 형이상학적 특성으로 파악하지 않고 유물론적 형이상학의 사유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그러나 천제(天帝)보다 먼저 생겼다”처럼, “기관들 없는 몸”이나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은 기관들로 가득 찬 사회체제가 유지되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서열체계가 아니다. 그 길은 “누구의 자식”이 아니라 현존하고 있는 어떤 관계로도 측정할 수 없는 “고아”의 길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그 “누구의 자식”이 아니라 “고아”라는 사실은 그것이 전제군주 기계라는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천제(天帝)보다 먼저 생겼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고 “천제보다 먼저 생겼다”라는 사실은 노자 시대의 사회체인 전제군주 기계의 궁극적 기표(signifier)인 “천제”보다 생산하는 욕망기계와 기관들 없는 몸이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체제에 의해 고착된 영토의 욕망과 기관들로 가득 찬 몸에서 탈영토화하여 내재성의 장을 사유하고 기관들 없는 몸이 지니는 생성의 욕망과 생성의 몸으로 나아갈 때, 기존의 사회체제도 이미 기관들 없는 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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