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와 욕망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
사람들이 다투지 않는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말라
사람들이 도둑질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산란하지 않다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면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사람들의 의지가 약해지고
그 몸이 강해진다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앎이 없고
욕망이 없게 하여
소위 안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라
하지 않음으로 하면
하지 못함이 없다
욕망은 생산하는 욕망이고, 생산하는 욕망은 하나의 기계이다. 생산하는 욕망이란 욕망의 근원적 성질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관계에 의하여 형성되는 현실적 욕망의 모습은 항상 그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구성의 형식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생산하는 욕망기계가 작동하는 모습을 들뢰즈는 연결적(connetive) 관계, 이접적(disjunctive) 관계, 그리고 연접적(conjunctive) 관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욕망의 근원적 성격을 예시하는 연결적 관계란 유아의 입기계와 어머니의 유방기계가 만나서 젖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욕망의 연결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 어머니의 유방기계는 젖의 생산을 통하여 아기의 생산 이후의 몸을 자체의 생성적인 몸으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하고, 유아의 입기계는 젖의 생산을 통하여 생성적으로 성장해나가는 몸을 만들어간다. 이처럼 외재적 요인이 배제된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의 내재적 만남은 “일 대 일”의 관계이며, 상호생성을 원칙으로 하는 생산의 생산이라는 연결적 관계이다. 우리가 욕망을 긍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산의 생산이라는 연결적 관계를 지향하는 욕망의 끊임없는 흐름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욕망의 다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체의 형성이다. 마치 인도에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오른 손 기계는 신성한 손이고, 왼 손 기계는 더러운 손”이라는 관념처럼, 사회체제란 욕망기계의 다양한 관계를 어떤 하나의 “일 대 일” 관계로 규정하여 수많은 욕망기계로 하여금 그 사회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이접적 관계의 욕망이다. 아이의 입기계를 어머니의 유방기계에 고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새롭게 생성된 어떤 사회체제도 또한 하나의 거대한 욕망기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체제로 원시토지 기계, 전제군주 기계, 그리고 자본주의 기계를 역사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사회체제라는 하나의 거대한 욕망기계는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욕망기계들로 하여금 그 사회체제 내부에 있는 생산체계를 따르도록 욕망하게 하는 수많은 만남의 작은 길(선분)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선분들을 그 사회체제의 코드체계라고 부른다. 따라서 욕망이 존재하는 한 개인과 사회의 구분은 없다. 우리가 보는 어떤 욕망의 개별적인 모습도 그 사회구성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욕망의 코드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욕망기계가 사회체제라는 거대한 욕망기계의 코드체계들이 배치한 영토들로부터 탈영토화하면, 사회체제라는 거대한 욕망기계도 또한 탈영토화한다. 개별적 욕망기계가 사회체제라는 욕망기계의 코드체계들 속에 있는 선분들에 따라 그 욕망을 기입하는 것을 군집적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코드체계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욕망의 개별적 선분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분자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토지 기계라는 사회체제의 작동은 토지라는 하나의 영토를 토대로 그 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인 욕망들을 영토화한다. 즉, 원시토지 기계는 모든 욕망기계들이 연결되는 관계를 토지라는 영토로 수렴하는 선분들을 코드화시킴으로 인하여 원시토지 기계라는 사회체의 거대한 몸덩어리를 유지시킨다. 즉, 개별적 욕망기계를 토지라는 욕망기계를 욕망하도록 코드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원시토지 기계 속에 있는 개별적 욕망기계가 이접적 만남을 욕망하는 코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원시토지 기계의 개별적 욕망기계들은 토지에 그 욕망을 기입한다. 이러한 이접적 만남으로 욕망기계가 생산하는 생산물을 우리는 기입(등록, 혹은 분배)의 생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욕망기계와 또 다른 욕망기계의 일 대 일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이접적 만남이라는 기입의 생산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모든 기계는 근원적으로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의 유방기계와 유아의 입기계의 만남이 끊임없이 지속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수많은 노마드들은 원시토지라는 영토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욕망기계의 끊임없는 흐름에 순응하는 연결적 만남이라는 생산의 생산을 욕망한다. 따라서 노마드의 생명성은 탈영토화로부터 시작한다.
일단 노마드의 욕망기계들이 탈영토화를 시작하면, 그것은 기존의 사회체가 욕망기계의 도도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 지니는 욕망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욕망기계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욕망의 다자적 관계를 연접적 관계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욕망기계는 연결적 관계, 이접적 관계, 그리고 연접적 관계를 순환하며 반복한다. 이러한 욕망기계의 흐름에 따라서 원시토지 기계는 스스로 탈영토화하여 전제군주 기계가 된다. 원시토지 기계라는 사회체제의 거대한 몸덩어리를 유지시킬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탈영토화하여 전제군주 기계라는 또 다른 거대한 몸덩어리로 재영토화하고, 그 사회체제가 고착되어 수많은 욕망기계를 억압하는 순간 전제군주기계는 다시 탈영토화하여 자본주의기계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제군주 기계는 원시토지 기계의 욕망의 코드들을 탈코드화하여 전제군주 기계의 코드들로 재코드화하지만, 그것은 근원적으로 원시적 토지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다. 전제군주 기계의 이러한 수단들을 만들기 위하여 형성된 것이 국가철학이다. 법과 도덕을 수단으로 하는 이러한 재코드화의 장치는 원시토지기계가 작동하던 시대의 지배자들이 전제군주기계가 작동하는 시대에 동일한 지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서구적 근대 자본주의 기계가 유지되고 있는 오늘날, 국가철학의 토대는 법과 사회적 도덕이라는 규칙을 근거로 국가에 봉사하고 있는 지식인이지만, 전제군주 기계가 작동하는 시대의 국가철학을 유지하는 토대는 전제군주에 봉사하면서 백성을 지배하는 원시적 토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영주이거나 지역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현인이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지속적으로 지배자에 봉사하는 현인과 전문적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인 성인을 구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시토지 기계라는 거대한 사회체제를 탈영토화하여 전제군주 기계라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만든 노마드의 욕망기계들은 이제 전제군주라는 거대한 몸덩어리에 자신의 욕망을 기입하고자 욕망한다. 전제군주기계의 탄생과 더불어 개별적인 노마드의 욕망기계들에게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추상적이고 권위적인 전제군주를 대행하면서 노마드들의 욕망을 지배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최초의 국가철학적 지식인들이 탄생한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공자와 맹자와 같은 현인들이다. 전제군주 기계라는 거대한 사회체제의 모든 욕망 코드들은 전제군주나 그를 대리하는 현인이라는 욕망의 코드로 수렴한다. 따라서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 사람들이 다투지 않는다”처럼 “현인을 숭상하”는 욕망의 한 코드가 깨어지면, 전제군주나 그를 대리하고 있는 현인에게 서로 다투어 욕망을 기입하고자 하는 전제군주 기계의 이접적 만남이라는 기입의 생산은 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전제군주 기계라는 거대한 사회체제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여타의 모든 욕망의 코드들도 자동적으로 깨어진다.
이것은 전제군주 기계라는 사회체제에 의하여 욕망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따라서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말라/ 사람들이 도둑질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산란하지 않다”처럼 “재화”와 같은 사회체에 의하여 만들어진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산란하지 않”은 상태는 욕망기계의 근원적인 형태인 흐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사회체제라도 그 사회체제가 존재하는 한, 욕망기계는 생산의 생산을 이루는 연결적 만남을 추구한다. 즉, 기존의 서열구조로 존재하는 사회체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 어떤 욕망도 욕망하지 않지만, 아주 자유로운 다양한 욕망의 선분으로 끈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한다. 따라서 연접적 만남이 생산하는 것은 생산의 생산도 아니고 기입의 생산도 아닌, 유쾌한 즐거움과 쾌락을 제공하는 잉여(혹은 소비)의 생산이다.
이러한 연접적 만남이 이룩하는 잉여의 생산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실천적 노마드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접적 만남이라는 실천적 노마드의 장 위에서 스스로 유쾌한 즐거움과 쾌락을 생산하는 존재를 들뢰즈는 “독신기계”라고 부른다. 노자의 시대에 이러한 독신기계는 전제군주를 추구하거나 그를 대행하는 현자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聲人)”이거나 “노마드의 생성적 관계에 대하여 더할 수 없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성자였고, 오늘날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는 예술가이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의 지식은 노마돌로지의 지식이다. 흔히 “문학과 예술은 마음의 양식이다”라고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러한 (노마돌로지의) 지식을 습득하면/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사람들이 의지가 약해지고/ 그 몸이 강해진다”. “마음”은 사회체에 의하여 코드화된 생각들이고, “의지”는 그런 코드화된 생각들에 의하여 사회체 내부에 다양한 선분들로 만들어진 기입적 욕망의 선분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음을 비우”거나 “의지가 약해”지는 것은 순수한 실천적 노마드의 장 위에서 몸이 느끼는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일차적 행위는 몸의 각 기관이 스스로 생성하도록 “배를 채우”는 행위이고, 그 결과는 흐름의 상태에 있는 생산하는 욕망기계로 이루어진 “몸이 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전제군주 시대의 성인과 오늘날의 예술가는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앎이 없고/ 욕망이 없게 하여/ 소위 안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라”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 소위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는 “앎”은 그 시대의 사회체에 의하여 강요될 뿐만 아니라 주로 전제군주를 보좌하는 현인에 의하여 유지되고 지속되는 국가철학이고, “욕망”이라고 하는 것 또한 그 사회체 내부에 이미 이러저러한 서열구조에 의하여 선분화된 욕망이다. 그래서 성인과 예술가는 “소위 안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국가철학이나 전제군주(혹은 국가)를 대리하여 이미 선분화된 욕망을 토대로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 “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이미 알려져 있는 어떤 앎이나 욕망을 토대로 해서는 안된다. 전제군주 기계나 자본주의 기계라는 거대한 사회체가 작동하고 있는 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이 세상에 알려진 앎이나 욕망은 국가철학이거나 어떤 서열체계에 의하여 이미 고착되어 있는 욕망이다. 따라서 기존의 앎이나 욕망으로부터 탈주하는 길은 기존의 앎이나 욕망으로 기관화된 몸의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욕망의 기관들로 가득 찬 몸이 기관들 없는 몸으로 변형되는 “하지 않음”은 끊임없는 탈영토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은 생산하는 욕망기계로 하여금 기존 사회체의 서열체계에 의하여 구조화되고 선분화된 앎이나 욕망에 자신을 기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욕망 자체의 흐름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존 사회체의 탈영토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반복하는 연접적 만남의 앎과 욕망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독신기계라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앎과 욕망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전제군주 기계나 자본주의 기계를 유지하거나 존속시키는 국가철학의 앎이나 그 속에서 선분화된 기존의 욕망으로 환원되는 위험이 없다. 따라서 성인과 예술가의 앎과 욕망은 과거나 현재에 의하여 재단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래의 앎이나 욕망으로 나아가 새로운 생성으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는 이러한 미래의 생성에 의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앎과 욕망으로 재계열화된다. 그러므로 성인과 예술가는 마침내 “하지 않음으로 하면/ 하지 못함이 없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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