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중순경이었다.
충남 예산의 거래처에 5억이 넘는 대금을 떼이자 '나쁜 일들은 떼거지로 몰려 다닌다'던
외할머니의 말씀처럼 나를 에워싼 모든 것들이 승냥이의 어금니같은 적의를 가지고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허망했다. 평소의 내 지병도 악화되었고, 주위는 동정이라기보다는
위안거리로 내 일을 안주삼았다. '허망을 배운 자는 이미 지옥을 경험한 것과 같다'던 이병주 선생의
허망에 대한 아포리즘을 위로삼아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잠을 설치던 여느 날과
같이 새벽에 선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새벽의 사위가 어둠을 헤치는 베란다
창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송현 스님이 떠올랐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빼 그 길로 중앙고속도로를
내달아 도착한 곳이 영주의 <부석寺>였다. 매표소를 지나면 일주문까지 약 500미터의 가로수 길이
마중하는 곳. 경내로 들어오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는 명상의 길로, 가을 철 가로수
은행잎이 물드는 날이나 비가 고즈녁히 내리는 날, 이 곳을 찾으시기를(그 한적한 우수가 그대의
마음을 방법할 것이리니..비내리는 날, 한계령 휴게소의 야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연이어
들려오는 양희은의 '한계령' 노래도 역시 기막힙디다만요. 역시, 강추)
일주문을 지나면 사찰의 부처님을 지키는 사천왕의 심문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지옥불을 견뎌 허망을 배운' 나인즉, 그들은 내게 심문의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
"그냥 들어 가시지요."
"아. 예~"
종무소앞 항아리의 연에 눈길이 멎는다. 가장 부패한 물에 뿌리를 내리는 연.
그리고 그 물을 정화시키고 기어이 피어 올리는 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연꽃.
배흘림 기둥의 본전인 무량수전,
배흘림이란 기둥이 위는 좁고 중간은 불룩하며 하단도 역시 가는 형상의 기둥을 말한다.
1000여년을 넘게 버텨낸 목조건물.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나도 마냥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갑자기 일옹선사의 말씀이 스쳐간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람들의 생각만 흐를 뿐,
시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는...
송원 스님은 출타하시고 법당에 들려 삼배를 올린다.
사람을 증오하는 나를 용서해 달라고..
내 안의 증오심을 비우게 해달라고..
내려오며 다시 연과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때려 소리를 내는 저 추녀 끝자락의 풍경처럼,
나를 도구로 써달라고..
그리고 그 길이 부처님의 길이라고..
일주문을 나서며 다시 가로수 길로 접어든다.
비오는 날, 번민에 괴로운 책친구님들에게 이 길을 권한다. 더불어 부석寺 주차장에서
나와 500미터 떨어진 좌측의 카페(옥호는 잃어버렸슴다)에 들러 부석寺에 오셨던 심경을
마무리 하시기를..
^^뱀꼬리^^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역시 인간들입니다. 제 경우,
그럴 때는 자연을 찾는 것이, 스스로 자연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 생각합니다.
부석寺 방문 후, 나는 넘치는 한낮의 스트레스를 가끔씩 미친 넘처럼 끓인 물 담은 포트를
쌕에 넣고 홀로 한밤중에 나지막한 아파트 뒷산을 오릅니다.
어둠에 묻힌 밤의 고요와 정밀은 내 모든 상처난 영혼을 방법합니다.
정상의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어둠과 별들은 오롯이 내가 되고,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또는 모든 원인과 결과는 기실 나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스승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었노라'고 뒤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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