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노마드의 생성

체 게바라 2006. 10. 1. 20:31

 

 

<노마드의 생성>


길을 길이라고 부르면 이미 생성적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으로 부르면 이미 생성적 이름이 아니다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고

있음은 만물의 어미이다


욕망 없음은 그 오묘함을 보고

욕망 있음은 그 변두리만을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와서 이름만이 다르다

함께 일컬어 가물하다고 한다


가물하고 또 가물하여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모든 노마드는 몸으로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노마드이기 때문에, 노마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몸을 지니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돌이나 나무처럼 구체적인 물질로 존재하는 것 들 뿐만 아니라 마을이나 사회, 혹은 사랑이나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도 포함한다. 따라서 돌이나 나무뿐만 아니라 마을이나 사회, 혹은 사랑이나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도 몸으로 존재한다. 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생명은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노마드를 사유한다는 것은 몸을 사유한다는 것이고,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생명을 사유한다는 것이고, 생명을 사유한다는 것은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는 운동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운동은 분자와 분자, 즉 몸과 몸의 관계 맺기이다. 몸과 몸의 관계 맺기의 다양한 선분들을 추적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이나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적으로 사용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은 몸의 운동, 즉 물질의 움직임이나 변화를 사유하기 위한 수단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노마드적 물질의 근원을 따지는 유물론적 사유가 절대불변의 관념을 우선시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국가철학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한다. 중국 고대의 노마돌로지였던 노자철학에서 '길'(道)이라는 유물론적인 언어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의 언어로 변천한 과정은 이러한 국가철학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하였다. 폭력이나 억압, 혹은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권력의 영토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마치 캄캄한 밤에 산길을 오르는 것처럼 모험적이면서도 또한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동적이다. 그러나 지배와 종속이라는 서열구조를 지니고 있는 국가철학은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삶의 길을 초월적인 것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초월성의 영토에 따른 현실의 규칙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 하는 초월성의 영토에 따른 현실의 규칙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사유로 나아가는 길, 그리고 지배와 종속이라는 서열구조로부터 벗어나는 평등을 토대로 한 구체적인 노마드적 삶의 생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그러한 삶의 길을 막는 어느 한 영토로부터 또 다른 영토로 이동하거나, 어떤 하나의 삶으로부터 또 다른 삶으로 이동하는 길과 연관되어 있다. 그 길 사이에 초원이나 산맥, 혹은 사막이나 바다가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길은 항상 사방으로 열려져 있어 사람들의 통행을 가로막지 못한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국가철학이 만든 억압과 폭력이 만든 문명의 역사가 아니라 이러한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서 자유와 평등의 대지를 찾으려고 한 노마드들의 탈주의 역사이다. 이러한 노마드들의 탈주선은 그들이 처한 시대와 장소의 억압과 폭력의 형식, 그리고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는 이 길을 억압과 폭력의 주체인 종교적인 사제나 국가적인 법률가의 입장에서 보도록 강요받고 있다. 경전이나 법률을 통하여 노마드적 생성의 탈주선을 전혀 다른 지배와 억압의 문맥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국가철학은 끊임없이 지배와 억압의 사건을 기록하지만, 노마돌로지는 끊임없이 탈주의 사건을 지운다. 이것들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종교적인 사제나 국가의 법률가라는 입장에서 볼 때, 길은 그들의 문명으로부터 탈주하는 길이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명을 상징하는 신이나 국가를 추종하여 그 상징물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길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착민들로 하여금 폭력과 억압, 혹은 설득을 통하여 신이나 국가를 추종하여 그 상징물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진정한 길이라고 믿도록 강요하고 끊임없이 교육시킨다. 따라서 정착민들은 물질이나 몸의 생성이라는 삶의 길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배와 억압에 의하여 우리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기관들에 대한 개념, 즉 우리의 몸으로 체화되어 있는 유물론적 인식을 버리고 몸이나 물질을 고정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언어수사학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삶의 길은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 상징들로 가득차 있는 신이나 국가의 이상에 다가가는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그 삶의 길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들 또한 허구적이고 신비한 추상적인 색깔로 덧칠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노마드적 주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길은 그냥 길이다. 물질과 몸이 노마드로 존재하는 점과 또 다른 점을 잇는 선분이 길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건을 잇는 것 또한 길이다. 따라서 노마드와 노마드들이 살고 있는 대지가 지니는 생명의 운동은 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힘과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나 조직이 등장하면서 길은 다소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미 존재하는 대지의 길과 삶의 생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여 폭력적 집단이나 조직이 영토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지나 노마드의 삶이라는 내재성의 장에 펼쳐지는 길은 무한히 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길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길을 길이라고 하거나" 권력과 폭력으로 영토화된 기존의 영토로부터 벗어나는 "탈주선을 이미 탈주선이라고 명명하면",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길이나 탈주선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길이나 탈주선 곳곳에는 이미 힘과 권력을 행사하는 쪽에서 수많은 함정과 바리케이트라는 노마드들을 정착시켜 지배하고자 하는 포획장치를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삶의 길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언어도 또한 물질적인 길과 동일한 특성을 지닌다.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의 삶의 길을 따른다 해도 이미 그 삶의 길은 권력과 폭력을 사용하는 집단에 의해 포획되어 수많은 함정과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뉴튼과 같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소리친들, 아니면 아인슈타인처럼 상대성의 이론을 들고 나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그러한 길은 근대 국가에 의해 전유되어 있다. 사유의 길이라는 방법론적 개념도 그렇다. 이미 남들이 사유하는 길은 진정한 사유의 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사유의 탈주선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항상 지금까지 가지 않은 길을 찾아서 그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길을 길이라고 하면 이미 생성적 길이 아니다". 그 길에는 수많은 위험과 재난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안전한 새로운 길, 새로운 탈주선을 찾아야만 한다. 노마돌로지를 사유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은 "언어는 결코 도(새로운 길)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오늘날, '언어도단'이라는 단어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지칭한다. 언어도단은 원래 노자와 장자의 노마돌로지인 도가적인 사유를 표현하는 언어인데, 신라와 고려시대에 불가적인 노마돌로지의 사유와 결합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서서히 오늘날의 의미로 변하였다고 본다. 이처럼 언어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는 집단적인 약속의 기호라는 사실을 밝힌 사람은 쏘쉬르(Ferdinand de Saussure)이다. 즉, '기표'(표현)와 '기의'(내용)는 항상 일대 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임의적인 약속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는 이미 규정된 이름을 사용하면, 항상 그 시간과 장소에 의해서 규정되는 영토화 된 사회구성체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이미 생성적 이름이 아니다". 어떤 하나의 이름(내용)을 이름(표현)이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운동을 하고 있는 생성적 이름(내용)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의해서 규정되는 이름(표현)이 된다.

 

그러면 '생성적 길', 혹은 '생성적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선분이나 길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점이 니니고 있는 운동의 힘을 일컫는다. 점은 '사건', 혹은 시뮬라크르(헛 것, 혹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점과 사건은 선분이나 계열이 이루어져야만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없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점과 사건은 선분이나 계열화에 의하여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에 단순히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국 고사성어인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 한 필이 없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모여서 위로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말 한 필이 없어진 것이 되레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마 뒤 잃어버린 말이 돌아왔는데 좋은 오랑캐 말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하의 말을 하니 노인은 "이게 나쁜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놀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니 노인은 "이게 혹시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후 또 한동안이 지나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 마을 청장년들이 모두 다 전장으로 끌려갔지만 병신이 된 노인의 아들만은 징집되지 않았다. 그렇게 전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희생되었지만 집에 남아있던 노인의 아들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임종욱, 412)


"새옹지마"에서 이야기하는 "말 한 필이 없어진" 사건, "말이 오랑캐 말 한 필을 데리고 돌아온" 사건, 그리고 "아들이 말을 타고 놀다가 정강이뼈를 부러뜨린" 사건 등등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사건 그 자체로 남아있다. 이것을 "좋은 일", 혹은 "나쁜 일"로 규정하는 것은 이미 길이라고 하는 것과 이름이라고 하는 것에 의하여 선과 악의 이분법적 판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점과 점, 혹은 사건과 사건을 이미 지난 과거의 선분으로 만들어진 길과 그 과거의 계열화에 따라 만들어진 이름은 그 길과 이름을 제외한 무한한 길과 이름을 희생한 나머지 하나일 뿐이다. 무한한 삶의 길과 이름에 대한 명명의 가능성을 버려야만 할까? 그러나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서열구조나, 혹은 그 이데올로기인 종교나 국가철학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노인"은 사건이나 노마드의 점이 지니고 있는 생성의 운동을 사유하기 위하여 어떠한 사건도 좋은 일이나 나쁜 일로 규정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物)의 있음과 없음은 그 어느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 깊은 산이나 바다, 혹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 등등은 처음에 길이나 이름이 없었지만,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 길이 나고 이름이 생겨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길이나 이름이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고",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길과 이름의 "있음은" 수없는 사건과 점들에 의하여 선분으로 이어지고 계열화되어 생성되는 "만물의 어미이다". 그리고 "나"나 "우리"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체의 입장에서 벗어나 천지의 우주를 생각할 때, "나"를 포함한 이 천지와 우주는 "없음"으로부터 사작했고, 아메바나 미립자 등등이 있음으로 오늘날의 만물이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나 "우리"라는 이미 만들어진 길이나 아름이 지니는 과거의 주체가 아니라 미래에 만들어지는 천지와 만물의 운동과 생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생성적 사유의 근본이 되는 물질의 생성적 성질을 사유하는 노마돌로지가 필요하다. 모든 노마드의 몸이나 물질이 하나의 점이고 시물라크르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점이나 사건과 선분으로 이어지거나 계열화하려는, 즉 그 자체의 의미를 생성하고 변화시키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성하고 변화하려는 성질을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생성의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 욕망은 "생산하려는 욕망"이고, 이러한 "생산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물질을 우리는 "생산하려는 욕망기계"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생산하려는 욕망기계는 미래에 생성되는 욕망의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은 항상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에 그 어떤 선분으로 이어지거나 계열화되어 그 어떤 하나의 "욕망의 길"이 되거나 "욕망의 이름"이 되어 있는 것은 항상 과거의 욕망이다. 우리가 선 분화된 길이나 이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욕망은 과거의 욕망뿐이다. 욕망의 생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느 하나로 선분이나 이름으로 규정된 욕망을 버려야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규정되어 있는 욕망의 길이나 욕망의 이름이 아닌 근원적인 점이나 사건의 "욕망 없음은" 현실로 드러나는 욕망이 아닌 미래의 무한한 생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그 (물질이나 사건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오묘함을 보고", 현실로 드러나는 욕망의 길과 이름인 "욕망 있음은"은 단지 욕망이 만든 과거의 "그 (물질이나 사건이 현실로 드러나는 표현의) 변두리(가장자리)만을 볼 뿐이다". 이것은 마치 본래의 나무와 (그 나무가 목공을 만나서 만들어진) 그릇처럼 "둘은 같이 나와서 이름만이 다를" 뿐이다. 목공이 만든 그릇을 나무가 아니라고 하거나, 본래의 나무를 그릇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근시안적인 시각인가? 이처럼 프로이드가 욕망을 자본주의의 부르쥬아 가족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과거의 "외디푸스"라고 하거나, 라깡이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욕망을 하나의 상징물로 환원하여 근원적 욕망을 현실에 대한 부정의 "결여"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근시안적인 시각인가? 이들과는 달리 들뢰즈는 욕망을 "생산하려는 욕망"이라고 부르며, 모든 물질을 "생산하려는 욕망기계"라고 부른다. 이 "생산하려는 욕망기계"는 순간 순간 "욕망 있음"과 "욕망 없음"을 무한하게 반복하고 순환하기 때문에 마치 있는 듯하기도 하고, 또한 없는 듯 하기도 한 희미한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는 "가물하고 또 가물한" 내재성의 장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생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물질이 그 스스로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은 "가물하고 또 가물한" 내재성의 장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생성의 힘이라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러한 "가물하고 또 가물한" 사물의 근원적인 내재적 특성을 들뢰즈는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사유의 "순수 내재성"이라고 부른다. 이 "가물하고 또 가물한" "순수 내재성" 속에서 "천지의 시작"이 있었고, 또한 "만물이 났으니" 얼마나 "오묘한"가. 마치 마법의 보물상자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내용물이 이 "가물하고 또 가물한" "순수 내재성" 속에서 순간 순간의 물질적 표현물로 나오니, "가물하고 또 가물한" 욕망의 있음과 없음의 이미지들은 미래를 만드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