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야벨리의 <군주론>/문지영 譯/ 까치 刊
왜 정치일까? 그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사회성의 인간이기에 가능한 질문일 것이다. 문제는 다수성에서 발생된다. 혼자보다는 강한 다수의 힘, 혼자가 아니기에 발생될 수밖에 없는 분쟁/투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분쟁과 투쟁에서, 다수에게 '보다' 공평한 힘이 발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의 관점에서 말이다. 원론적으로 정치의 발생이 이렇다면, 실제 정치는 어떤가? 그것은 아니다. 정치란 (자기)이익이라는 목적아래 움직이는 권력의 대립과 투쟁의 장이지 않은가. 물론 '보다' 올바르고 보다 타당해야 않겠는가 에서, 아니 뭔가 조절해줘야 할 것은 있어야 하기에, 정치적 인간에게 정치가 없을 수는 없다. <군주론>이 어떤 책이기에, 정치에 대한 서론을 얘기하는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체제 중 하나인 군주제에 대한 담론이다. 미덕보다는 악덕한 심성이 먼저 활동하는 실제 삶(인간)에 대한 적확한 시선을 제기한 것인데, <군주론>은 군주제의 현실정치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읽은 역사서로부터 기존의 군주들에 대한 평가가 실려있다.
먼저 내용을 먼저 살펴본다. 우선은 역사상 정치 제제는 군주국 아니면 공화국이었다는 것을 들어 군주국의 종류를 말한다. 군주국의 종류에는 세습, 혹은 신생군주국이 있다. 그렇다면 세습군주국이 아닌 군주국에서는 누가 과연 군주가 되는가? 타인의 무력에 의한 도움을 얻거나 혹은 자신의 무력에 의해 군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운 또는 호의에 따른 경우와 능력에 의한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자타군사력과 운 혹은 능력에 의해 군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 자신의 능력/무력에 의해 군주국을 세운 왕들을 말한다. 예로 드는 군주 중 능력과 운을 갖춘 군주로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등을 언급한다. 이어 타인의 힘의 의해 군주가 된 이들의 사례를 말하고 있고, 그리고는 사악한 방법으로 군주에 오른 왕들의 사례를 다룬다. 그럼에도 왜 악덕한 방법으로 군주가 된 이들이 군주로서 자리하게 되는가도 다룬다. 사악한 시혜는 단번에, 그리고 시혜는 천천히 한 게 그 원인이다. 군주가 되었다면, 국가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귀족, 신민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다룬다. 국력은 어떻게 측정되어야 하는가도 다루는데, 거기에서는 국가 군사력의 중요성을 다룬다. <군주론>을 통해 가장 강력한 주장은 자기능력이다. (모세와 같이 신에 의한 선택일지라도 그것도 능력으로 인정한다.) 자기 능력이 있는 자가 군주가 되어야 하고, 군사력은 자기 군사력이어야 하며, 필요에 따라 용병이나 원군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용병이나 원군은 늘상 위험의 요소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군주는 신민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여야 하는가를 묻는데, 그것은 아니라도 한다. 사랑보다는 두려움에서 신민은 말을 듣는다, 그 이유는 통치 즉 지배를 위해서가 될 것이다. 플라톤이 정치세계에서 설득의 어려움을 깨달았던 것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였다면, 마키아벨리 역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주창했던 사보나롤라로부터 무력한 언어/설득에 관한 깨달음으로부터, 냉혹한 정치세계를 안 듯싶다. 뜻이 좋다고 일이 잘 되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문제는 다수가 움직이게 할 것인가, 다수를 끌고/지배하고 갈 것인가가 아닐까? 움직일 능력을 가진 자에게는 힘(권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움직일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는 그 힘(자기능력)의 우선순위를 무엇보다도 (자기)군사력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군주의 소양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게는 하되, 미워하게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미움받지 않는 첫 번째 요소로 재산을 빼앗거나 아녀자를 착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너무 쉬워 보인다. 그런데 그게 과연 쉬울까? 사실상은 어려운 일이다. 군주라 해도 타인의 재산에 타당한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몰수하지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쉽지는 않다. 권력이 내 손에 있을 때,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구분할 이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군주가 신민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은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우선하도록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두려운 자에게는 저항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갖게 하되 미움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도 강조한다. 이것은 어떤 지도자나 생각해봐야 할 덕목인 듯하다. 군주제에서는 신민과 함께 간다고 하더라도, 정치가의 길이란 게 사랑 받고 싶은 자가 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지도자가 사랑 받아야만 지도자가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지지되어야만 위정자의 자리 자체가 가능한 게 아닐까? 물론 이해관계로 인해 정치란 반드시 불편부당성의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지지)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다수에게 사랑(지지)은 받아야만 하지 않을까? 민주와 공화의 영역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다수인가의 문제는 늘상 남는다. 군주란 관후함과 인색함에서 무엇에 더 치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개인과 개인에게 관대함이 우선이라면, 정치가에게는 인색함(검소함)이야말로 미덕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사실상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약속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술책이 진실을 이긴다. 군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찬양 받을 만한 것인지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는 자신의 약속을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혼동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맞서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122쪽)
군주가 가야할 바는 신의이지만 정치체제에서 약속을 지키는 게 우선인가, 이익이 우선인가를 물어본다면, 현실을 직시한다면 약속이 얼마나 유야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주론>은 교황청의 지배와 프랑스, 혹은 스페인의 침략을 받게 되는 자신의 나라 이탈리아가 보다 강력한 나라가 되길 염원하는 마키아벨리의 열망이 담겨있는 책이다. 그런 까닭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력한 국가가 되길 바라고, 강력한(능력있고 운이 따르는) 지도자가 등장하길 바란다. 군주의 조건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삶은 이처럼 생각하는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군주라 할지라도, 외양상으로는 그러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 있다. 정치가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이라는 영역이라는 것으로 역자가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설사 속으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비도덕적인 일을 하더라도, 보이는 곳에서는 말로는 도덕자의 모습으로 보여야하는 것이 그것인데, 과연 이것이 쉬울까?...허위만의 득세하는 것은 아닐지.
이제 이 책의 25장 '운명이 인간사에 얼마나 많은 힘을 행사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운명에 대처해야 하는가'를 잠깐 살펴보자. 원래 관심이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에 관한 관심에서 읽기 시작한 <군주론>이다. 그에 대해서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운명은 인간 행동의 반 이상을 통제한다고, 세상이란 운명과 신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반이상을 움직이는 운명인데,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가? 마키아벨리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정치가인 것이다. 영역확장의 성향이 없다면 진정 정치가라 할 수 없을 듯하다. <군주론>을 보자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운명이란 우리 활동의 반만 주재할 뿐이며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 통제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에 이끌린다."(170쪽)
그는 운명에 대해 강물의 범람으로 얘기한다. 강물의 범람을 박는 제방처럼, 운명의 위력에 방어할 둑을 건설한다면 예방/방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 대담한 자들과 벗하는 운명에 대해서 얘기한다.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어 운명은 여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여신(운명)은 젊은 사람들에게 이끌린다고 한다. 그리고는 메디치가 당신의 가문이야말로 이탈리아를 강력한 군주국으로 선택받았다는 아부를 하는 마키아벨리다. 그리고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서로 책은 마무리 된다.
<군주론>은 예상과 달리 책은 의외로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그렇다고 해서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감행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에 대해서 호의적인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누군가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조직의 장이었을 때, 당신이 속한 영역의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게 됐다고 한다면, 당신이 그걸 외부인들과 함께 배분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이 쉬울까? 쉽지 않다. 그래서 정치는 진리 영역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한 이익이라는 정치적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치는 분명 예상되는 그림을 그리는 창조적 영역이 아니다. 정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재)분배/쟁취하기 위한 결정공간이 아닐까?
<군주론>을 통해 '군주란 과연 어떤 자일까, 아니 어떤 자이어야 할까'를 한번 살펴보자. 누구나 군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신의 선택과도 같은 능력을 지녔거나, 주변인의 군주 만들기의 힘에 의해서 군주가 된다. 그들이 군주가 도는 것은 지배하기 위해서, 즉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목적이지, 봉사하기 위해서가 목적이 아니다. 물론 요즘 같은 공화국에 있어서, 정치를 선 권력 후 봉사로 한다는 게 타당할까라는 의문하게 된다. 보통은 선봉사 후권력의 이미지인데 말이다. 이렇듯 정치가는 권력을 지배하려는 속성/능력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늘상 나아가려는 속성이 강하다. 그 본성에서 정치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군주론>으로 돌아가 보자. <군주론>이 인자하고 온후한 군주를 바라고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그렇다고 공명정대한 군주의 탄생을 바라면서 쓴 글일까? 물론 그것도 아니다. <군주론>에 등장하는 군주는 국가가 존속할 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군주다. 냉혹한 현실속에서 굳건히 발을 딛기 위해서는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어야 하고, 때론 사자와도 같아야 하고, 때론 여우와도 같아야 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사용할(배울) 수 있는 군주다. 왜 이렇게 치열한가? 이유는 이렇게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나(이탈리아)'는 사라질 것이기에 그렇다. 국가와 국가 또한 약육강식의 생태계와 같이 본 것이다. 한국가의 지배자인 군주란 무릇 백성이 살 공간을 확장해야 하고, 백성에게 안정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명정대한 세상을 향한 목적을 위해 <군주론>이 집필된 게 아니다. <군주론>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 아래서 집필됐다. 그런 까닭에 <군주론>은 다수를 위해 봉사할 정치가라는 허울좋은 이미지가가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 통치란 사실상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본다. 다스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신민들을 다스려야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러한 소명과 자질(소양)을 지녔다는 것과 함께 운명적인 요인이 작용할 것이다. 신하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담긴 마키아벨리의 편지글을 보자.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에게 올리는 <군주론> 헌정사 중 일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다시 정치세계에 발을 담글 수는 없었다.
"제가 가진 것 중 근래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과 고대사에 대한 꾸준한 독서를 통해서 습득한 위대한 인간들의 행적에 관한 지식만큼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사안들을 정성들여 검토하고 성찰했으며, 그 결과를 한 권의 작은 책자로 정리하여, 이제 전하께 바치고자 합니다."(9쪽)
일단 <군주론>을 읽으며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자유를 지향하지만 나 홀로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다수의 정치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해관계의 엇갈림이 있고, 힘 분배가 있게 된다. 이렇듯 곳곳에 산재한 마키아벨리즘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군주론〉을 통해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마키아벨리즘으로 통한다.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로 인식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오명으로만 치우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오명이 아니라고 본다. 분명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이란 권모술수에 대해서 냉혹하게 이론을 제시한 책이다. <군주론>을 집필한 목적이 하나로 통일된 강성한 이탈리아를 만들려는 염원이었다고 하더라고, 인간 현실정치를 냉혹하게 꼬집어냈다는 것에 대한 오명은 여전히 써야할 것 같다. 누구나 알고 있는 악의 승리에 대해 자조하고 준비하게 했다고나 할까. <군주론>은 병법이 아닌 통치론 가운데에서 이런 오명을 쓸 책이다. 아마도 오래오래 써야할 듯하다. 그만큼 읽게 될 것이고 말이다. 현실정치 자체에 대한 눈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마키아벨리즘만의 판이 되지 않는 정치가 가능할, 견제할 수 있는 조건의 모색을 위해서도.
마키아벨리가 마키아벨리즘으로 오명을 얻게 된 데는, 학자적인 그의 태도라기보다는 로마사에 대한 역사가적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의 저서로 <로마사 논고>가 있는 것을 봐도, 그의 관심사는 이탈리아의 전신인 로마제국이었던 듯싶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아 아니라, 정치 현상에 서 있는 누군가의 눈에 들어온 실제 정치체제를 기록했다.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대로 역사를 본다. 엄밀하기보다는, 활용(모방)할 방법만의 제시가 강한 책이 바로 <군주론>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런 책을 왜 오늘날에도 읽을까에 대해 의문해볼 것이다 . 역사상 대개의 나라는 군주국 아니면 공화국이라고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가 공화국이다. 그런 시대에 왜 군주론일까? 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의 시대인 오늘날 왜 <군주론>을 읽어야 하는가? 우선은 군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군주제와 비슷하게 혹 생각하는 위정자의 '생각/착각' 차원에서 읽어야한다. 위정자와 군주는 같지 않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군주는 다르다. 그런데도 흔히 그런 오해를 하는 자도 있을 듯하다. 군주론을 통치론이라고 볼 수 없을 듯하다. <군주론>이 통치사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고, 통치자인 군주에 대한 담론이 담겨있지는 하지만, 전적으로 통치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또하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악에 치닫는 인간의 그러한 속성을 모를 자는 없다. 다만 그렇게 악용될 조건에 자신이 시험당하길 원치 않는다. 최선이 아닌 차선의 악이 출현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는 정치에 대한 주의 차원에서는 읽어야할 듯하다. 모색과 견제 차원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읽는 이유는 사실상, (정)답이 없는 삶이기에 읽는 게 아닐까?...
어쩌다가 마키아벨리즘을 어원이 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옹호자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연혁을 살펴보면, 공화주의자였다. 그가 말하는 공화제와 군주제의 차이에서, 그가 지지하는 공화제에서 발휘되는 것은 자유이다.
"공화국에는 더 많은 활력, 더 많은 증오, 복수에 대한 강렬한 집념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유를 쉽게 잊지 못하며, 실로 잊을 수도 없다. "(37쪽)
그런 그였지만 그는 <군주론>을 썼고, 군주에게 발탁되어 정치에 몸담기를 바랬던 자이다. 피렌체의 명문가 집안에 태어났지만, 법률가였던 아버지는 매우 어렵게 집안을 이끌다가 파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독학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나는 즐거움 이전에 인고(忍苦)를 먼저 배워야 했다"라고 말할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은 인고의 시절이었던 듯하다. <군주론>에도 등장하는 극단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했던 도미니쿠스회 수사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후 그는 29세(1498)의 나이로 제2서기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1951년 스페인 군대에 의한 피렌체의 함락 이후 공화정이 해체되자, 마키아벨리 또한 장관직에서 해임된다. 급기야 복귀한 반(反)메디치가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투옥된다. 재판 후 석방된 피렌체에서 약간 떨어진 농장에 은둔하면서 <군주론>의 초고를 집필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끝내 다시는 정치세계에 몸을 담지는 못한 듯하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 여기에 접목시키면 안될터인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군주론>을 읽었는데, 문득 군주에서 국가로 생각이 이동한다. 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확장 지향적이면서 보수적이어서 가능한, 강력한 국가의 전형은 무엇인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강정인 ㆍ문지영옮김, 까치,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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