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체 게바라 2006. 11. 13. 09:49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현상을 대하는 자세 혹은 관점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나름대로 압축하면,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 있어 왔으나 사람은 그것을 보는 ‘관점’ 즉 패러다임을 새롭게 발명한다는 것이다. 뉴튼이 모든 물체는 서로 잡아당기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있다는 ‘관점’을 발명했다.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 물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뉴튼에 의하면, 태양과 지구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이 지구를 매달고 있으며, 그 끈이 끊어지면 (예를 들어 어떤 이유로든 태양이 순간적으로 폭발하거나 분해되어 사라진다면) 그 ‘즉시’ 지구는 끈 떨어진 연처럼 우주 속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시타인은 그 이론에 2% 부족함을 느꼈다. 아인시타인의 생각은, 태양이 사라졌다는 그 사실이 지구에까지 전해지는 데에는 최소한 빛이 지구까지 오는 시간은 걸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태양이 사라진 후 지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궤도를 이탈하는 것은 적어도 8 분 30 초(?) 빛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 이후라는 것.


아인시타인은 지구는 끈으로 태양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탄력 있는 텀블링 매트에 볼링공을 놓았을 때 생기는 움푹한 웅덩이의 수평 방향 경사면을 따라 야구공이 (볼링공 쪽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계속 회전하는 개념으로 도식화 한 것이다. 이 때 볼링공을 순간적으로 꺼내버리면 그 부분이 탄력 때문에 평면으로 돌아오는데, 볼링공이 누르고 있던 곳부터 차례로 평면화가 주변으로 진행하지만, 아직 야구공이 돌던 부분이 경사진 채로 있는 한 야구공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돌던 방향으로 곡선회전을 한다. 드디어 그곳까지 평면으로 돌아가는 순간, 야구공은 구르던 방향의 연장선을 따라 그냥 제 갈 길로 가버리는 것이다. 이 모형에 따르면 서로 잡아당기는 끈을 상상할 필요가 전혀 없다.


간단한 얘기지만,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아인시타인의 여러 창의적인 시각은 양자역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것들은 오늘날 미시세계 및 우주의 이해를 위한 궁극적인 이론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장황하게 썰을 푼 이유는, 결국 자연은 그대로 있으되, 인간은 그것을 보는 눈과 해석하는 도구를 발명해 낸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현미경이나 로켓을 만들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 보는 눈이 생기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형상화 한 결과로 볼 수 있다는 것.


이 원리를 종교에도 적용해 보면, 불경이건 성경이건 이미 문서로 확립된 경전은 매양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새로운 체계를 사람이 만들어 낼 때 도약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그대로 필사되어 전해졌지만, 형제회를 비롯한 개혁적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보았으며 루터는 그로부터 종교개혁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기독교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왜 그토록 많은 종교인이 보수적이고 수구적으로 변했나 하는 것에 대한 힌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떠받치고 많은 사람들을 도그마 속에 묶어두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이다. 지옥과 이단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성직자들은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을 극도로 꺼린다. 잘못된 해석은 신자를 오도할 수 있고, 그것은 곧바로 지옥행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들은 믿는다). 따라서 ‘늘 그대로 있는’ 성경이지만, 그로부터 루터나 아인시타인과 같은 눈으로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내는 것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며 두려워한다.


물론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피해가 있어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석은 시대상황에 따라 부단히 발전하며, 그 시대에 맞는 믿음이 정립되는 것이다. 계시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일부 성직자들은 성경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그것을 권력화 해서, 신자들을 그저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얻어먹는 거지 상태로 ‘사육하면서’ 신자로부터 피와 살을 착취하는 게 현실이다. 신자 자신의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다.


경직된 해석과 도식화 한 태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일견 이런 태도가 도움이 되는 것은, 적어도 현실을 더 악화시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 보다는 오늘의 확실하며 견딜만한 불행(더 나빠지지 않는다는 믿음과 함께)에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기본적으로 생명체란 (건전한 의미에서)보수적이다. 즉, 변화에 저항한다. 체온과 심장박동은 일정한 범위 내로 유지한다. 생명체를 둘러싼 환경이란 것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확실성은 필연적으로 생명체에 위협으로 작용할 확률이 크다. 지구 전체 기후에 격변을 가져오는 빙하기를 누군들 반기겠는가? 이렇듯 ‘생명의 기본적인 성향’ 즉 생명의 안정을 볼모로 잡고 창의성을 말살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의 비극인 것이다.


따라서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지옥 또한) 권한 및 그 사후 세계의 운명까지 틀어쥐고 사람을 공포로 다스리는 기독교계, 그 권한을 자자손손 누리려는 부패한 성직자들이 그 성향을 추종자들에게 대물림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전래의 부패한 유교정신 ― 왕권제일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주의(?) 와 결합하여 최악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다. 하나님을 유일한 최고권위로 받드는 교리는 ‘권위와 특권’을 핵심요소로 하는 위의 세 가지 악습과 아무런 저항 없이 결합하였고, 이에 더해 독재까지 품에 안았을 때, 최악의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에 더하여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잔혹한 강점으로 자존심을 짓밟히고, 아부하고 아래로 기어야만 목숨을 부지하는 비참함, 권력에 기대야만 살아날 수 있는 인간성 말살의 현장 속에 모두들 오늘내일을 전전긍긍하며 연명하였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떨쳐 일어났던 수많은 선각자들을 잡아 죽인 비참한 우리의 과거…


이미 사슬이 끊어졌는데도 고통을 상상하고 지푸라기로 만든 회초리에도 꼼짝 못하는 코끼리처럼, 자신의 운명을 몇몇 사람에게 맡겨놓고 노예처럼 사는 군상들… 그것을 악용하는 못된 정치 모리배들과, 우리만의 시각을 조금도 허용 않는 강대국들… 외상(trauma)의 상처에 끊임없이 소금을 뿌리며 우리를 조종하려 드는 못된 것들… 요약하면, 살아서는 못된 성직자와 전쟁광에게 시달리고 죽어서까지 사후세계를 남의 손에 맡기는 인생 - 이것이 우리의 현 주소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의미 탐구에 대한 열정을 격려하며,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과 예술이 꽃피는 세계 (?) 스스로 원동력을 창출하여 발전 진화하는 사회 -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 이것이 인류의 목표 아닌가?


적어도 우리나라에 건전한 진보와 건전한 보수의 목소리는 전혀 없고, 그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특권에 기대어 사람들을 억압하려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이 사회, 창의성은 시들어가고 편법과 불법이 판치는 사회(?) 이런 모습이 바로 일제 강점과 참혹한 전쟁 및 독재치하에서 온 구조적 모순임을 사회 구성원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개선해 나가는 사회,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 나아가 온 세상에 봉사하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꿈은 이리도 멀단 말인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창의성과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나눔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여,

이제 할 일을 하자.


― 이 땅의 소산이 우리 함께 먹기에 부족해서 이리도 헐벗고 굶주리는가?

― 이 지구가 우리 함께 살기에 좁아서 이리도 물어뜯고 죽이며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