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박찬욱이 던지는 복수의 의미

체 게바라 2006. 11. 2. 09:27

 

 

박찬욱이 던지는 복수의 의미


처녀작인 <공동경비구역 JSA>이라는 통속영화를 제외하면,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와 그가 연작으로 발표한 복수라는 주제의 마침표인 <친절한 금자씨>에서 박찬욱은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럼 그의 영화가 가진 새로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테고, 그에 대한 답변은 ‘복수’라는 것도 정해져 있다. 한데, ‘복수’라 함은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주제가 아니었던가? 예컨대, 수많은 액션영화(특히 무협영화)들이 그런 원형적 이야기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럼, 우린 박찬욱 이전의 ‘복수’와 박찬욱의 ‘복수’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수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종의 ‘교환’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주는 자가 존재하고 받는 자가 존재한다. 그럼 ‘복수’라는 교환은 어떤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인류의 교환의 형태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교환의 형태는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공동체나 가족 안에서의 교환과 같은 호수적인 것. 이것은 상호부조적이지만 구속적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네이션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서 존재합니다. 다음은 봉건적 영주처럼 연공을 계속 받기 위해 그것을 어느 정도 재분배하는 것. 오늘날 그것은 국가에 의한 세금의 징수와 재분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입니다. 다른 두 가지와 달리, 여기서 교환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합의와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폐를 가진 자가 유리하고 잉여가치의 착취와 계급분해가 생깁니다. - 일본정신분석(국역본 제목: 일본정신의 기원), 언어와 비극 302쪽 역주로 인용되어 있음 - 


박찬욱의 ‘복수’는 ‘호수적인’ 것으로, 그것은 공동체내부의 교환이라는 강제적 증여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지 않은 ‘호수성’이란 단어를 좀더 명확히 정의 내려 보자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증여를 받은 쪽이 준 쪽에 뭔가를 갚음(酬: 갚을 수)으로써, 상호관계가 갱신,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가장 본원적인 형태가 바로 친자관계이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부모에 대한 효孝든, 자식에 대한 자慈든, 형제에 대한 友愛든)이라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박찬욱의 두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끈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이념이다. 그것은 항상 파괴된 가정을 타인을 파괴함으로 ‘상징적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사실 이런 파괴를 통한 상징적 회복노력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닌데, 고진의 말대로 호수적인 것의 오늘날의 형태가 네이션이라면,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끝없는 악순환의 근원을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의 유명한 장면은 송강호가 개울에서 신하균을 죽이면서 내뱉는 말일 것이다. “난 네가 착한 놈이라는 것 잘 안다. 하지만 넌 죽어야 해” <올드 보이>에서 유지태는 최민식이 행한 짓에 큰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유지태는 그(그와 그의 딸)에게 자신의 행위를 반복시킴으로 복수를 하려고 한다.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장면은 ‘신화’나 ‘비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흔히 <올드 보이>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비교되는데, ‘근친상간’이란 소재와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오늘날에는 식상하게 된) 미스테리적 구조 외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추리소설의 트릭들에서 어떤 철학적 논리를 찾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것들은 모두 관객들이 질리지 않을 만큼만 사용되는 유행도구에 불과하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왕에서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오이디푸스왕과 올드보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오이디푸스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환’이 아니라 ‘희생’이라는 점과 ‘부친살해’라는 가족파괴(공동체파괴)와 관련이 있다.


수많은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복수극’이 박찬욱의 ‘복수’와 다른 것은 무협영화에서는 항상 ‘복수’에 대한 회의를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복수의 대상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라든지 하는 진부한 설정만 봐도 그렇다. (여기서 당연 복수의 지연이 등장하고, 이와 같은 지연은 가족이념을 넘어서게 되어 어떤 비극을 불러오곤 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복수자들에게 일말의 회의도 없다. 그들은 결코 가족이념 바깥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박찬욱 영화가 잔인한 것은 바로 그런 가족이념(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가족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사정은 잘 알고 있다. 네가 악의가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죽어야(복수를 당해야) 한다.” 박찬욱 영화에서 이런 논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복수로 제한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공동체의 논리로 확장 가능하다. “이라크에 융단폭격을 가하면 죄 없는 민간인이 죽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교환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미국제국주의의 공동체라는 가족이념이 그걸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적 문제’ 완전히 거세되어 버린다. 왜냐면 윤리란 ‘법’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고뇌를 의미하는데, 박찬욱의 인물들에게 처음부터 ‘법’에 대한 감각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윤리적 우울을 느끼지 않는다. (그의 영화 속 공간은 깔끔하게 표백된, 그래서 낯설게 보이는 사회적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윤리적 우울이라 함은 ‘법에 대항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내세운 새로운 법의 논리가 자기모순에 빠졌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린 이것의 전형적인 예를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앞두고 고민하는 ‘햄릿’과 자신이 행한 사회적 복수로 행한 후 열병을 앓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부채의식은 타인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는데, 왜냐면 ‘법으로서의 타인’은 가족이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 햄릿,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문제되는 것은 ‘복수 자체’가 아니라, ‘복수 이후’라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사회인류학적으로 보통 법은 개인적 복수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개인적 복수가 사회적 복수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는 법이라는 사회적 복수기제에 대한 先 개인적 복수 감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법 앞에 先 복수.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와 같은 복잡한 ‘윤리적 복수’의 문제는 제거함으로 깨끗하게 표백한 잔인한, 그러나 단순한 복수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복수’의 숭고화가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세계는 영화보다 현실에서 훨씬 자주 일어난다. 그런 현실적 기반이 명확히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영화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와 같은 복수는 오늘날에는 가족적인 차원이 아니라, 네이션이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다는데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꾸 가족적 차원으로 되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형태를 정반대이지만, 이는 헐리우드 영화의 내재적 문법이기도 하다. 가족애가 지구를 구원하기도 한다)


 문제의 본질을 역전시키고 나면 남는 것은 숭고화된 복수의 기괴함과 섬뜩함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복수의 필연성(분노)과 잔인성(거부감)이라는 이중구속으로 관객 압박에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결국 ‘분노’ ‘잔인성’ 둘 다를 포기한 얌전한 관객으로 영화관을 나올 것이다. 가족이념은 보호받기만 한다면(사태만 진정된다면) 다시 얌전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박찬욱에게 있어 복수는 공동체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복수 연작의 방점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일단 매듭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친절한 금자씨>는 백선생의 죄를 뒤집어쓰고 죄를 대신 받음으로서 구원받았으니까, 저 토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처럼..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는 복수를 통해서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넌지시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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