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세상 어느 곳에도 중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국가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오랜 시간 축적된 문제라 할 수 있는 정경 유착은 가진 자의 편에 선 국가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폭력, 좌파라 불리는 이들을 향한 억압 등의 사례 등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례에서 국가는 특정 편에 서서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굳건히 하는데 기여해왔다. 특히나 군부정권 독재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우리 사회였기에 이는 더욱 심각했다. 예전에는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로 종종 번역되곤 했던 아나키즘에 대해서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서도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당화되고 있는 국가 권력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아나키즘에 대한 고민은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아나키즘은 우리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독재에 저항하던 많은 이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분파 마냥 아나키즘을 이해했고, 이는 여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부르는 이들은 곧잘 사회주의자로 지목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아나키즘은 분명 마르크시즘과는 또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난 70-80년대 우리네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결집된 움직임, 그들이 꿈꾸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아나키즘은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하나의 권력에 대항하는 결집된 움직임이 또 다른 권력을 창출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집단으로부터 다른 집단으로의 권력 이동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와 같은 싸움 속에는 ‘집단’만이 존재한다. 하나의 집단 안에 소속된 수많은 개개인들은 오로지 집단으로서만 존재할 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비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의 노동 운동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운동 주체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집단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 그것은 결코 해방일 수 없었다. 집단을 개인으로 환원하는 작업은 어쩌면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도주의적 아나키즘의 고드윈,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의 슈티르너 그리고 자유방임적 아나키즘의 터커. 이들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 색채의 아나키즘은 어찌 보면 공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결집된 운동을 부인하곤 있지만 이를 대체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을 향한 강렬한 신뢰의 회복만이 진정한 개인의 자유를 완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던 고드윈에게서는 강한 계몽주의적 냄새가 풍긴다. 이기적인 자아의 회복을 통한 안티즘(?)을 추구했던 슈티르너의 철학 안에는 인간 본능의 추구가 선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고드윈적 전제가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터커가 시장질서에 기반한 완전경쟁을 상정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이는 어찌 보면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부합하는 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의 경계를 없앰으로써 보다 큰 규모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오늘날의 시장 질서를 굳이 아나키즘으로 분류해야만 한다면, 아나키즘을 배반한 아나키즘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집단에 익숙한 우리에게 여전히 아나키즘은 정의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하지만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잃었던 개인의 목소리를 되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우리 사회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우리는 느낀다. 사회주의가 또 다른 국가주의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눈뜬 우리에게 아나키즘은, 구체성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진보된 미래사회를 꿈꾸게 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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