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의 <노마디즘>
- 1장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천개의 고원}에 대한 국내 소장학자의 주석서이면서 나름대로 들뢰즈/가따리를 해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많은 의의를 갖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마디즘}을 읽어 나가면서 들뢰즈/가따리와 차이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주의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개의 고원}은 1968년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진경이 추구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과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할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리좀장에서 이진경의 주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서 천개의 고원에 대해서 더 가까이 접근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
먼저 가장 큰 맥락에서 오독은 리좀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 = 다원론이라는 점을 이진경씨가 간과하고 수목과 리좀의 이분법에 매몰되어 결국에는 이원론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진경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목형의 다양체는 이미 결정된 어떤 것이므로, 새로운 것의 추가나 새로운 변이체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다양체 자체의 차원수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리좀적 다양체와 대비하고 있는 겁니다. ({노마디즘1} 100p 6~9)
이진경씨는 리좀이 n-1의 지평인 주어진 현실로서의 일자를 뺀, 혹은 초월자나 군주나 유일자를 뺀 다중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1968년을 기억해 보자. 학생과 노동자들은 주어진 현실의 정체성인 '학생은 학생이다'라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다중이 되어 거리를 메웠다. 또, 노동자들은 일하는 者라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공장을 정지시킴으로서 다중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적 절편에서 다중으로의 거대한 절대적 탈 영토화의 물결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진경씨는 리좀과 수목구조를 상대적인 탈 영토화에 가두고 있다는 점을 {노마디즘}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무와 뿌리 리좀과 운하라는 두 모델의 대립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 것이며, 끊임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라는 거예요.....여기서 저자들이 새로이 도입한 이분법적 개념 자체가 해체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이원론을 파괴하기 위해 이원론적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마디즘} 118p 13~26)
다중이라는 리좀과 위계체적 국가제도의 조직원리인 수목이 이원론을 파괴하기 위한 이원론이라는 괘변을 통해 다시 부활하는 이분법이 되는 이 지점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리좀도 인정하고 수목도 인정하는 걸까요? 들뢰즈는 수목 속에서도 리좀이 발아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도 내에서도 다중이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수목적 위계마저도 리좀이 뒤덮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좀이 수목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즉, 리좀이라는 일원론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요. 국가장치마저도 리좀이라는 다중은 포괄해 내고 있었다고 점을 의미합니다. 리좀을 지배하고 있는 수목으로 보이거나 리좀과 대응적으로 이분화된 수목으로 보이는 국가는 사실 민중의 자율성에 덧씌워진 가상이며, 다중 리좀에 기생하는 체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진경은 일원론자가 아니라 이원론자이기 때문에 다중의 역능의 총합인 자율성을 회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진경은 막대 구부리기라는 레닌주의자적 전략을 다시 살려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들뢰즈의 자율주의적 요소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내재성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의 고정된 본질, 내적인 본질이 없으며, 다만 다른 것 (외부!)과의 관계 따라, 접속한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고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내재성은 '외부'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외부의 사유고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마디즘}120p, 12-20)
이진경씨는 내재성을 표면적 배치라는 외부의 변화에 따른 외부적 변화라고 보고 있다. 외부로의 접속을 통해 변화하는 게 내재성이라는 이진경씨의 논지는 다중이 노동자다, 학생이다 등의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내재적인 잠재력을 긍정하고 다중이 되는 소수자 되기를 통한 다중 되기로 나아간다는 지점을 접속의 표면이론으로 바꾸고 있다. 여기서 이진경은 표면만 애기하지 내재적인 잠재력인 역능을 애기하지 않는 전형적인 레닌주의의 의식의 외부도입테제의 변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중에게 있어서 기관없는 신체라는 내재적인 장으로 되는 것은 일상적인 과정이며, 그것은 소수자되기에서 다중되기로의 진행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며 착취당하면서도 완전히 노예화되고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노동을 거부하면서 역능을 증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력의 차원은 삶이라는 기관없는 신체에서 내재하는 것으로서 소수자되기를 거쳐 다중리좀이 되는 것이다. 과연 이진경씨와 같은 논리진행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진경씨가 리좀을 과정으로 보지 않고 체계로 도식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한번 외부로의 접속이 어떻게 수행되는지 이진경씨의 말을 들어보자,
통상적인 의미에서 이접과 통접은 관련된 항들을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접속은 두 항이 등가적으로 만나서 제3의 것,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합니다. ({노마디즘} 93p 11-15)
그렇다. 이진경씨는 접속만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이 만나서 생성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통접을 구성하는 과정이 접속인데 말이다. 되기는 이접에서 가능한 부분인데 말이다. 이진경씨가 이런 접속의 논리를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접속을 이접과 통접의 과정이 아니라 이상적인 등가적 만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이진경씨는 평균상태의 등가성을 리좀으로 바라보고 있다. 접속은 이접과 통접의 결합이며 이것의 과정이다. 이것을 분리시키면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에서 소수자되기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진경씨말은 한마디로 이접, 통접보다 그리고, 그리고 식의 연결되는 접속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중되기의 과정이 얼어붙고 고착되면 근대적 주체인 정체성주의의 함정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다중되기의 과정을 이상적 체계속에 얼어붙게 만들려 했을까? 그 이유는 이접과 통접을 수목적 구조로 보고 접속을 리좀적 구조로 보는 이원론을 작동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은 앙띠외디푸스를 한번이라도 훑어본 독자들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논리임을 의미한다. 물론 뿌리가 이접이라면 곁뿌리는 통접이라는 도식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목적 사고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문제는 리좀의 관점에서 보면 이접과 연접은 통합되어 접속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문제를 간과한 새로운 체계를 세우려는 이진경의 이론적 노력에 대해서는 높이 사줄 만하다. 하지만 그는 리좀이라는 다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그것을 화석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진경의 {노마디즘1}의 리좀의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는 리좀이라는 넓은 대지에서 다중되기를 거치지 않은 설익었지만 뜨거운 감자였다고 생각된다.
원본인 <천개의 고원>의 모사물인 {노다미즘}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불균형을 보면서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속편을 보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오늘날은 만리장성을 인민이 만들었냐? 진시황제가 만들었냐?'는 이분법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다중 리좀의 거대한 내재성의 장에서 생성되는 힘에 의해 국가는 압박되어 움직이고, 자본이나 국가가 덧씌워져 기생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진경씨는 생성하는 다중의 거대한 지평과 포괄성에 주목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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