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노엄 촘스키-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체 게바라 2006. 7. 5. 17:51

 


 

 하이데거가 말하길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 받았다.” 비록 저주이기는 하나 자유로운 것은 인간이다. 그것이 비록 저주만큼 귀찮고 성가신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유를 비난하고 나섰다. 오랜 투쟁의 끝에 피와 맞바꾼 자유인데 그걸 반대하다니 이게 웬 말인가. 하지만 이상할 것 없다. ‘자유로운 것은 인간’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인간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기업이다. 기업이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간과 같은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는가?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기치아래 자유롭도록 허락받았으나 정작 저주는 ‘국민’에게로 돌아갔다. 촘스키는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실상을 폭로한다.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는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로 한 저널의 소개에 따르면 ‘현재 살아있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며 ‘언어학의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에 의해 전적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급진적인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는 한편 미국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빌어먹을 촘스키’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학자이다. 백인 남성이며 유대인이자 미국의 잘나가는 대학(MIT)의 교수인 그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는 별개로 국제정치와 사회문화, 그리고 언론에 대한 ‘좌파적’ 비평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원제-Profit over People)는 그가 인터넷 진보잡지 < Z >에 기고한 글들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촘스키는 우선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를 통해 알려준다. 신자유주의란 단지 모든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아담 스미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유 시장에 대한 맹신이란 일종의 과학적 사기일 뿐이며 그 실상은 영국의 인도경제 수탈 이래 서양강대국들에 의해 줄곧 유지된 약탈논리가 재포장된 것으로 세계질서(Global Order)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지배체계를 보다 공고히 하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끝으로 더 이상의 강제적 수탈이 불가능해지고, 피식민지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이 성숙하자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무지한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다단하고 교묘하게 꾸며진 논리가 필요하다는 데서 탄생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시종일관 묘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매우 음흉하다. 우선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들이대는 잣대가 정직하지 못하다. 이들이 주장하는 시장원리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면 ‘당신에게는 시장원리가 좋다. 그러나 명백하고 즉각적인 이득이 없다면 내겐 부적절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장하준이 그의 저서「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실감나게 그려놓았듯이 강대국들 자신은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성장한 후 이제 와서 후발 주자들의 문을 강제로 열어 재끼려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이 미국에, 미국이 일본에, 그리고 이제는 모든 강대국이 제3세계 국가들에 자유무역을 요구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부자를 경멸했고 그와 뜻을 함께한 고전자유주의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결과의 공정한 분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신자유주의에서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러한 생각이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라고 공격하기 까지 한다.

 

 워싱턴에 위치한 IMF 본관 건물 입구엔 ‘세상의 모든 가난을 퇴치하자’라는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대량실업과 양극화, 공공부문의 몰락이 이어진다. 신자유주의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부의 확실한 재분배와 생활수준 향상을 보장했으나, 결과는 미국 투자자들과 이들에게 협조한 부자들의 이익만이 증가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경제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었고,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극심한 손실이 전가되었으며, 세계적인 환경재앙의 초래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인 법적 평등마저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들의 당찬 계획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서였을까?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시George W. Bush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땐 이게 맞는지 몰라서 그랬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촘스키의 지적대로 시장지상주의 이면에 자리 잡은 정부의 강력하고도 비열한 개입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정부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대 자본주의체제의 구심점이 되어서, 기업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기업의 이익 창달을 위해 노력한다. 또한, 정부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빈곤층과 노동자를 무시하고 있으며 시장경제가 세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WTO, IMF, NAFTA, MAI 등을 통한 은밀한 공작으로 보다 쉽게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게다가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올 경우 바로 무역장벽을 치는 이중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레이건 이래 보호무역주의는 미국의 또 다른 경제정책이었다. 미국의 이 두 얼굴은 세계경제를 멋대로 지배하면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욕망의 뻔뻔스러운 산물이다. 정말이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언론 역시 촘스키의 날카로운 펜을 피해갈 수 없다. 복지비의 지출을 줄이면서도 국방비는 늘린다. 공정한 경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자본에 의한 노동의 완전한 종속만이 가속화할 뿐이다. ‘기회 없는 자유’라는 악마의 선물이 곳곳에 배달되고 있지만 정부에겐 이 범죄를 막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피해를 입는 것은 대다수의 민중들인데 어째서 정책은 반대 방향으로만 나가고 있는가? 그것은 지배계층이 일방적으로 정보를 소유하는 정보의 비대칭적 소유구조에 기인하는 것으로 촘스키는 이를‘동의 없는 동의’곧 여론 조작(Regimenting the Public Mind)이라 부른다. 독재국가에서나 비민주적 국가에서는 무력이 사용될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잘 확립된 국가에서는 아니다. 폭력의 사용이 제한을 받게 될 때, 국민들의 동의는 소위 여론조작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얻어내야만 한다. 이 여론조작은 미국의 정치 사상가 제임스 메디슨이 말했듯이“정부의 첫째 임무는 무엇보다도 부유한 소수를 다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는 원칙하에 무지한 다수를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민주사회의 기초 원리인 피지배자들의 동의는 다수의 횡포에 불과하므로 그들을 방관자의 입장으로 놔두고 단지 동의 없는 동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소수 부자들의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체제 모두에서 피지배자들에게 정치선전 등의 형태로 여론을 조작해 온 것을 통해 이미 증명되어 왔다.

 

 참으로 암울한 이야기지만 촘스키가 전한 것은 세기말의 묵시문학 같은 절망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보통선거권, 여성의 권리, 노동조합, 시민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조직화된 정치운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국적 거대 기업의 폭력과 여기에 놀아나는 정치인들과 언론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은 대대적인 정치운동뿐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란(우연히도 NAFTA가 발효된 날 반란이 시작되었다)이나 1998년 4월 27일 MAI(다자간 투자협정)을 결렬시킨 '파수꾼'(노동조합, 환경운동가, 인권운동가 등으로 이루어진 반세계화 연대)들의 노력이야말로 권력층과 특권층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이상과 억압받는 민중을 보호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임을 보여주는 희망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버렸다. 이젠 마치 그 길을 걷지 않으면 모조리 가난의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경쟁은 모든 영역에 침투했고 시장은 선하며 항상 올바른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신화가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다. 이는 주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완전경쟁시장’의 모델만큼이나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자유시장이 후생을 증가시키는가에 대한 문제는 오랜 기간 학자들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물론 국가의 개입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듯이 시장 역시 늘 좋은 성과만 낼 수는 없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자유시장의 성공을 장담하는 이들의 이중적 행태이며 이러한 그들의 은밀한 뒷거래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강한자만이 자유를 누렸다. 어떤 세력이 강해지면 자신들의 자유를 요구한다. 강한 민족만이 자유를 누렸고 약한 민족은 노예로 살아야 했다. 경제력이 부르주아 계급에 집중되면서 그들이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후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얻어나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기업(분명히 해두자. 기업은 사람이 아니다)이 무한대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기업이, 정확히 말하자면 초국적 자본이 이미 국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목적이 ‘고객만족’따위에 있지 않음을 안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든지 여론을 조작하고 정부를 좌지우지한다는 것 역시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론 국민들과 노동자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사상의 자유 시장을 인정하지 않는 반쪽짜리 신자유주의는 그래서 그 이름마저 민망한 것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정말 ‘자유주의’가되려면 모든 영역에 있어 자유를 인정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한 참여가 보장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을 우선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곱게 이행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짓이다. 촘스키는 “당신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너무 정직해서 힘이 빠지는 소리 같아도 잊어서는 안 될 말이다. 선택은 결국 나-우리-의 몫이다.


당신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우리의 몫이며,

결국 당신의 몫이다.               

 

                       -노엄 촘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