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들은 ‘고정관념(fixed idea)’이라 하면 으레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의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1830)’을 떠올리곤 한다. 이 교향곡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관현악법과 획기적인 화성으로 음악사에 기록된 명곡인데
베를리오즈 자신이 전달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고정관념(‘고정악상’이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듯)을 중심으로 음악을 전개시킨다. 고정관념은 하나의 특징적 선율로써 고전주의 교향곡에서처럼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곡 전체에 걸쳐 이야기의 구조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된다. 물론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 주기도 하지만...
언론의 고정관념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소위 메이저 언론이라고 불리는 조폭 언론들은 자신들이 마치 사회라는 오선지를 앞에 둔 전지전능한 작곡가인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상상력에 따라 세상을 구성하고 그들 찌라시 한 귀퉁이를 장식할 등장인물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반복시키고 있다. 아쉽게도 음악의 경우와는 달리 이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속 소녀보다는 훨씬 더 복잡할 테니까.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없을 수도 없는 이 고정관념을 우리는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언론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사건에 접근한다. 현실의 특정부분을 선택하여 그 부분을 보다 중요하게 표현하며, 이러한 방법으로 특수한 문제를 정의하고, 해석하고, 도덕적인 평가와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언론은 이슈를 구성하는 다양한 의미의 속성들을 선택하고, 그 선택된 속성들에 대한 현저성을 높임으로써 어떤 이슈가 중요하다고 인식시킬 뿐만 아니라,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 인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이재천, 삼성언론재단)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도 마찬가지인데 접근하려는 인물에 대한 일반의 기대(흔히 이미지라고 부르는)를 충족시켜줘야 할 의무(?)가 있기에 그 부분을 더욱 확대하고 억지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유시민에 대한 메이저 언론의 프레임을 살펴보면 대체로 ‘튀는 행동’, ‘분열주의’, ‘갈등의 생산자’, ‘독설가’, ‘광신적 노대통령지지’ 등을 들 수 있다. 가끔 ‘권위주의에 대항’, ‘논리적 달변’ 등의 이미지를 씌우기도 하면서 균형감각을 찾으려 애쓰는 ‘척’하지만 결국은 ‘갈등과 분열’이라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수렴하고 만다. 따라서 유시민이 어떤 말을 하던 신문지상에서는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해석되며 이 프레임을 깨고 진심이 전달되기를 기대하기란 박근혜 대표가 국보법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는 것을 기대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어떠한가? 역시 유시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유시민의 프레임은 노 대통령의 프레임의 복사판인데,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또 하나 추가된 것이 있다. 바로 ‘경제에 관심이 없는 대통령’이다. ‘경포대(그들이 말하기로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란다)’라는 신조어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는지 대통령이 하는 모든 말들을 정치공세와 복수극으로 덧칠해 놓고 마치 대통령의 관심은 오직 정권 재창출에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기에 급급한 언론들. 정권 재창출하려면 우선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는 것을 대통령이 모를까봐 친절하게도 귀한 지면을 할애해 설명해주지만 이러한 감동적 호의는 위와 같은 프레임 아래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의 70%가 경제관련 회의이고 끊임없이 경제관련 대책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말이다. 언론의 우리말 사용 수준은 아주 놀랍도록 세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깜빡 속아넘어가기 일쑨데 예를 들어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잘못되었다’라는 말과 ‘대통령이 경제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은 천지차이이다. 전자가 토론을 이끌어 낸다면 후자는 불안과 절망만을 생산해 낸다. 조폭 언론들이 나라를 망치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이러한 표현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꼭 조폭 언론들이 아니더라도 언론은 경기에 대해 놀랄 만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경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이미 ‘국민생활이슈’라는 프레임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도트 부크홀츠(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신문이 전성기를 선언하는 법은 없다. 역사책만이 그럴 수 있을 뿐.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볼 때 1960년대 중반이야말로 경제의 전성기였다. 고도의 경제 성장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케인스 이론은 만능인 듯 했다. 그러나 당시의 신문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절망과 불안한 경제전망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좋은 시절은 당연히 오는 것이기에 음미하려들지 않았다. 경지침체가 와야 언론은 떠들썩하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온 것처럼 난리법석을 피운다.”
언론의 경기에 대한 반응이 이러할진대 노 대통령에 대한 프레임과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할 가공할 비관론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프레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을 선별해 한정된 지면에 담아내야 하는 신문들은 당연히 선별을 위한 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고 비평을 위해 특정한 관점을 가져야 할 수밖에 없으니 프레임이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존재해야만 한다. 문제는 프레임이 형성되는 과정이 공정하고 적절했느냐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불의를 들추어내는 사람을 곱게 볼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처럼 만들어 내지는 말아야 한다.
프레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다른 면이 있지만 우리들 개개인도 사물을 관찰하거나 인물을 평가할 때 일종의 프레임을 갖고 접근한다. 최초의 만남에서 얻게 되는 정보, 즉 첫인상으로부터 시작되는 통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 인물의 모든 면모에 고정적으로 투영되는 평가체계로 발전해 나간다. 그 결과가 조선일보 마냥 추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왜곡된 정보와 전달과정 상의 오류로 인해 심하게 일그러져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언제나 극히 일부임을 감안한다면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미 굳어진 이미지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안별 접근이란 원칙을 세운다 한들 수 십 만 년간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생성된 인간의 감정을 순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프레임을 갖고 있고, 그것은 언제나 수정되어야 할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아주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사고는 늘 유연해야 하며 자기성찰은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가진 프레임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조선일보의 자식들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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