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은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에서 필리핀의 예를 들어 소위 '세계화'가 세계의
빈민들의 구제에 효과가 있었다고 아래의 글에서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논리의 일단은 '세계화' 이전에도 빈민은 존재했으며, '세계화' 이후에 빈민이 갑자기 증가하였다는 일부 '세계화' 반대론 자들의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희박하며, 오히려 '세계화'가 일자리 창출을 통해 빈민들의 구제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논거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확산을 통한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과 민간 부문의 산업을 황폐화(특히, 농업과 자영업, 제조 중소기업 등 자본에 취약한 산업)시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그의 논리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합창하는 세력들의 대응논리로도 언급되기에 소개합니다.
<값싼 노동력을 찬미하여: 저임금의 열악한 일자리라도 무직보다는 낫다.>
스모키 산(Mt. Smokey)이라고 알려진 마닐라의 거대한 쓰레기 집하장은 오랫동안 언론이 제3세계 빈곤 문제의 상징으로 즐겨 다루던 곳이다. 수천 명의 남녀와 어린 아이들이 그 쓰레기장에서 살았다. 생존을 위하여 온갖 악취와 파리와 유독성 폐기물을 견디면서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다니며 고철이나 다른 재활용품을 찾아 모았다. 그런데 그들은 자발적으로 거기서 살았다. 그곳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는 가족들은 하루에 10달러 정도를 확실히 벌 수 있었고, 그만한 벌이는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도 나았기 때문이다. 그들 무단 거주자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96년에 환태평양 정상회담을 앞두고 환경미화운동의 일환으로 필리핀 경찰이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에 나는 스모키 산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에 받은 한 보따리의 증오에 찬 메일들은 읽고 나서이다.
내가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칼럼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그 기고문에서 나는 제3세계 신흥 수출 공업국들의 경우 임금과 그로 조건이 형편없이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그들의 상대적으로 눈에 잘 뜨이지 않던 농촌 경제 시절의 빈곤”에 비하면 크나큰 개선이라고 지적했었다. 하긴 나로서는 그런 말을 쓰다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힌 편지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렇소. 당신은 미국 대학 교수라는 안락한 지위를 잃어도 다른 일자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요-당신이 12살이고 하루에 2달러를 벌기 위해 일할 용의가 있는 한 말이오.”
이와 같은 도덕적 분노는 세계화를-고임금 국가로부터 저임금 국가로의 기술과 자본 이전 및 그에 따른 제3세계의 노동 집약적 수출국들의 성장을-반대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것이다. 이들 비판론자들은 그와 같은 과정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모두 순진한 자가 아니면 타락한 자이고, 어느 쪽이든 국내외를 막론하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글로벌 캐피탈의 사실상의 앞잡이라고 무조건 간주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고, 도덕적 기준은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대 소송을 제기하고자 한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들의 고상한 도덕적 논조는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철저히 생각해 보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유수의 자본가들이 세계화로 득을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크게 득을 보고 있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그렇다. 제3세계의 노동자들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전 세계적 빈곤은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어제 오늘에 발명된 현상이 아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제3세계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지금도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시달리고 있다)그 당시에 비록 아시아의 몇몇 작은 나라들의 급속한 경제 성장이 주목을 끌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인도네시아나 방글라데시 같은 개발도상국들은 원료를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해 온 종래의 산업패턴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비효율적인 제조업 부문이 수입 쿼터 제의 보호를 받으며 국내 시장에 대한 공급을 맡고 있었지만, 일자리는 별로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인구 증가의 압력에 떠밀려 절망적인 상황의 농민들은 불모지라도 개간하든가, 아니면 다른 방도의-그러니까 쓰레기 산에서 거주하는 것과 같은-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처럼 다른 기회라고는 아예 없었기 때문에 자카르타나 마닐라에서는 약간의 보수만 주고도 노동자들을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값싼 노동력만 가지고는 개발도상국이 공산품을 들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었다. 선진국들의 확고한 이점-사회 인프라와 기술 노하우, 월등하게 큰 시장 규모와 핵심 부품공급 능력, 그리고 효율적인 경제운용에 필수 불가결한 정치적 안정 및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사회 적응력 등등-은 임금이 10배, 20배 높다는 약점을 얼마든지 상쇄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몇 가지 요인들-낮아진 관세장벽, 개선된 통신환경, 저렴해진 항공운송 등-이 조합되면서 개발도상국들이 안고 있던 불리한 생산여건을 완화시켜 주었다. (그 외에 다른 사정은 똑같아서 여전히 제1세계에서 생산하는 편이 나았다-기업들이 멕시코나 동아시아로 생산 시설을 이전했다가 제3세계의 불리한 환경을 겪은 다음에 되돌아 온 이야기는 흔하다)많은 산업 분야에서 개발도상국들은 저임금에 힘입어 세계 시장을 파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종전에는 황마나 커피를 팔아서 먹고 살던 나라들이 이제는 의류와 신발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의류나 신발 공장의 노동자들은 부득이 극히 적은 임금을 받고 지독한 근로조건을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여기서 내가 “부득이(inevitably)”라는 말을 쓴 까닭은 고용주들이 자신들의 위생에는 관심이 없고, 임금은 가능한 한 적게 주려고 했는데, 그 최적 수준은 노동자들에게 다른 일할 기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건은 극빈국들, 그러니까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다니며 폐품을 수집하는 것이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온존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수출 산업이 성장한 모든 나라들에서는 일반 국민의 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성장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좀더 높은 임금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다른 부문에 있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제조업의 성장은-그리고 이 새로운 수출 부문이 창출하는 고용기회의 확대는-전체 경제에 대하여 파급효과를 던진다는 사실이다. 우선 토지에 대한 압박이 완화되어 농촌임금이 상승한다. 또한 도시에 사는 실업 인력은 일거리의 감소에 늘상 신경을 쓰고 있고, 그래서 공장들은 노동자들을 위해 서로 경쟁하기 시작하여, 결국 도시 임금도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이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말하자면 한국이나 대만 같은 나라-에서는 평균 임금이 미국의 10대가 맥도널드에서 버는 수준에 육박해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더 이상 쓰레기장에서 살려고 하지 않게 된다.(스모키 산은 존속하고 있다. 필리핀은 최근까지도 이웃 나라들과 같은 수출 주도 성장 정략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품 수집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는 여전히 극히 부족한 실정인 것이다)
신흥 공업 경제 국가들의 경우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을 통해 대다수 국민들이 받게 된 혜택은 막연한 추측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와 같은 나라는 여전히 아주 가난한 형편이다. 그래서 발전 수준을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섭취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계량할 수도 있는데, 이 나라의 국민 1인당 섭취량은 1970년 이래로 하루 2,100칼로리 미만에서 2,800칼로리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어린 아이들의 1/3은 여전히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하지만 1975년도의 경우에 그 비율은 1/2이 넘었다. 이와 유사한 생활은 환태평양 지역 전역에서, 나아가 방글라데시와 같은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서양의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해외 원조는 결코 크지도 않았지만 최근에는 아예 제로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당 국가 정부들의 온정적인 정책 덕분도 아니다. 그들 정부가 냉담하고 부패해 있기는 예나제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무정한 다국적 기업과 자국의 탐욕적인 기업가들, 관심이라고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값싼 노동력을 써서 이익을 올릴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있는 자들이 벌인 행동의 간접적이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 관계하고 있는 자들의 근본 동기가 아무리 치사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 수억 명의 사람들이 극빈 상태에서 여전히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나아진 수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편지를 보낸 이들은 왜 분노하는가? 시간당 60센트를 받으며 신발을 만드는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이미지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 뼘의 땅에서 일하며 시간당 30센트 정도를 버는 다른 인도네시아인-또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필리핀 사람-의 이미지보다 왜 더욱 격하게 감정을 자극하는가?
나의 생각에 그 주된 이유는 일종의 까다로움에 있다.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농부와는 달리 신발 공장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우리 미국인들의 이익을 위해 노예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이에 더하여 국제 노동기준에 대한 독선적인 요구가 있다. 즉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주장하기를, 그러한 신발과 셔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괜찮은 임금을 받고 괜찮은 근로 조건에서 일하게 되기 전까지 그 제품을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인즉 온당하기 그지없는 것 같다-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 결과까지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자.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제3세계의 노동자들에 대해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근로 조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들 나라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들, 일용 노동자들, 폐품 수집자들 등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개발도상국들로 하여금 우리의 근로 기준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은 기껏해야 특권적인 노동 귀족이나 생기게 할 따름이지 대다수 빈곤층에게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조차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제1세계 산업이 행사하고 있는 기득권은 여전히 대단하다. 고용주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개발도상국들이 제1세계의 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능력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지속적인 산업 성장의 전망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성취해 온 성장까지 뒤집어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수출 주도형 성장은 그에 따른 모든 불공평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에게 큰 혜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성장을 박탈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원칙은 아무리 좋아도 일자리가 없다면, 우리의 양심이 편해질지는 모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런 보탬이 없다.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이 넉넉한 사람들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고 신을 꿰매는 미천한 일을 떠맡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안은 무엇인가? 마땅히 외부의 원조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어쩌면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비록 남부 이탈리아 같은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원조 덕분에 종속 상태가 항구적으로 굳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결과는 차치하고 이렇다 할 원조 계획이 구체적으로 시행될 가능성은 눈꼽만큼도 없지 않은가. 그들의 본국 정부가 사회 정의의 실천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물론이다-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현실적인 대안도 없이 저임금에 토대를 둔 산업화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순전히 심미적인 기준-즉 그들 노동자들이 부유한 서양인들에게 유행 상품을 공급하는 대가로 푼돈이나 받는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극히 빈곤한 사람들이 발전을 이룩할 최고의 기회를 앗아가는 처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컨대 나에게 편지를 보낸 양반들이 독선을 부린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뿐이다. 수억 명의 희망이 걸려 있는 만큼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바람직한 지적 태도로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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