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죽음에 대하여 1

체 게바라 2006. 5. 21. 10:09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죽음이 아직

오지않았다고 해서, 젊고 건강하고 부유하다 해서, 죽음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개인에게 평생 따라 다니며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죽음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우리는 건강과 돈, 권력을 추구한다.

인간은 죽음을 안고 태어나며 어쩌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 모두 죽어가는 과정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종교도 이 죽음의 공포나 불안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자신에게 부과된 유한성을 인식한 인간은 종교적 믿음 등을 통해 끊임없이 그 자연법을 벗어나고자

한다. 천국을 상상하고 종교적 예식을 통해 삶을 마무리하는 것도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준다. "우리는 유한하다는 것읋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는 않는다."라고

마르셀 콩슈는 말했다. 즉,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에게

죽음은 항상 타인의 죽음일 뿐 자신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죽음 후의 세계를 확신

할 수 있는가? 붕확실하다는 것처럼 인간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없다. 과연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있을까?

 

칸트는 이 죽음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장 불행한 자에게도"

라고 말했다. 칸트는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보다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들며 이로부터 두려움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늬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였다. 그는 죽음의 의미를 절대화하여 인간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정당하며

오히려 죽음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고 경박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나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나의 삶의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나를

덮칠 수 있는 존재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이 사실을 인식함과 동시에 불안과 고독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두려움은 원초적

두려움이며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는 죽음이란 고유한

것이며, 결코 남과 바꿀 수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실존 상황이므로 언제

어디에서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용기를 지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동서

고금의 모든 권력자들이 온갖 망법을 동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했으나  영생을 얻지 못했고 세 명의 젊은이로부터 기증된 피를 마신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도

죽음을 면하지는 못했다. 

 

죽음이 과연 무엇이기에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죽음이란

생명의 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죽음이란 생명력의 상실을 의미

한다. 이는 생물적인 개체의 해체이며 살아있는 유기체가 시체로 변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체는 

죽음읋 겪게 되며 생명을 갖지 않은 것은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음이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더리도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인간과 가장

유사한 고등동물의 경우에도 죽음을 잘 지각하지 못한다. 동물은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은 종족의 시체와 살아있는 유기체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죽을

것을 의식한다는 사실은 매장의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된 미라와 장신구들은 

영혼불멸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소망을 보여준다. 불사에 대한 희망은 죽음을 단순히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확고한 이 사실에 대한 보상을 받고 환상을 통헤서나마 두려움을 초월하려는

의지이다. 이처럼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실존적 태도는 죽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그것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순된 태도를 현대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동일한 의식이

죽음을 부인하게 하고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방식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영혼은

살아 남는다고 믿는 것이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했고, 신비주의자 플로티

누스는 죽음이란 신체만을 앗아가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영혼의

불멸이야말로 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영생을 약속했다. 또 동양의 몇몇

종교에서는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영혼의 불멸을 확신한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주장만큼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것이 있을까?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면 죽음은 단순한 도정에 지나지 않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에 비판적이었던 에피쿠로스의 제자 루크레티

우스는 "두려움이 신들을 창조했다"고 말하면서 불멸을 믿는 인간의 허약함과 광신의 본질을 비판했다.

"이 모든 현상을 신에게 일임하고, 불굴의 분노로 무장시켜 주기까지 한 가련한 인간들이여! 그때부터

신은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은 탄식을 안겨주었는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가? 그들이 후손에게

열어주는 눈물의 샘이라니!........신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리지 않는 마음이 어디 있는가? .............

마르크스 역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란 외침과 함께 내세에 대한 희망이 현실의 행복을 포기하게

한다고 강렬히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종교란 "고통에 지친 존재들의 한숨이자 냉정한 현실의 심장"과

같아 고통을 잠시 망각하게 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홉스나 흄 등도 종교적 믿음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심리적 공포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영원한

내세를 기약함으로써 인간은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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