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인 것이 진리인가'라는 질문은 언뜻 보기에 허무맹랑한 물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철학 전통에 있어 주관적인 것은 진리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란 절대적이며 주관성이란 오류의 환상이다"라는 믿음을 공유했던 철학자들은 주관적인 나의 개인적 사고를 포기하고 점차적으로 보편적인 사고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데아와 같은 보편적 사고의 틀 안에서 개별적인 생각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주관적인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절대적 진리는 마치 그것이 인간의 참여없이도, 즉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만약 진리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나의 생에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아무리 진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이 내 개인의 생각과 감정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일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나의 주관적 생각은 황당하고 허무한 견해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말하는 보편wjr 진리에 어긋난다 해도 나의 주관적 생각이 진리 못지않게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나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행동동인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주관성이란 여러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관성이란 자신의 개인적 입장에서 사물(사람)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반면 객관성이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확한 판단기준에 근거하여 사물(사람) 혹은 사건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제3자의 관점을 뜻한다. 흔히 사람들은 주관성이란 이성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감성적인 것이며 스쳐지나가는 연속적 감각과 느낌의 집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느낌은 지속적으로 어떤 사실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관적인 앎은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형상이 존재하는 세계만이 진리이며 현상세계와 경험세계는 모두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진리란 육체성을 배제한 영혼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으며 수많은 감각의 흐름은 우리에게 보편적 무지만을 안겨줄 뿐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학자들이 이런 전통을 따랐다면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수많은 감각, 순수한 지각에 대한 신임으로부터 확실성을 이끌어 냈다. 그들은 사물들이 내게 보여지는 것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령 바람이 불 때 한 사람은 추위를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면 바람의 진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감각은 항상 옳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도 발견된다. "감각은 과학과 같고 항상 실재하는 대상을 갖고 있으며, 오류를 저지르지않는다."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순수한 감각은 변하고 유동적이며 같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만 어떤 꾸밈이나 위조가 없기에 그 자체로 진리라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듯이 진리란 무한한 감각의 연속이며 지금=여기서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앎의 지침이 될 수 있을까? 이 경우 진리란 감각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인식으로 정의되며 우리는 진리가 아닌 진리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주관적인 것이 진리다"라는 주장은 개인이 진리의 척도임을 명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은 인간의 시각은 모두 다르고 인간에 따라 진리는 상대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 경우 인간에 대한 고찰은 더 이상 보편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개개인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소피스트들은 언제나 옳고 바른 보편타당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도 진리일 수 있고, 저것이 진리일 수도 있다" 는 현대의 상대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는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인 어떤 논리가 만고불변의 표준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감각적인 주관성이 과연 진정한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소피스트들의 개인의 주관성에 대한 옹호는 심각한 회의론을 야기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리란 결국 관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데 더 이상 진리의 기준이 없고 변화하는 진리들만이 있다면 그리하여 서로 모순되는 의견들만이 존재하고 모든 의견을 타당하다고 평가해야 한다면 진리란 개념 자체가 존폐의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그 정의상 유일성, 보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사에서 주관적인 것은 진리와 별개로 인식되어 왔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진리로 간주될 때 이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주관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절대진리의 부정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주관적인 생각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면 근본적인 선이 부정될 것이고 모든 것은 허용되기 때문이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잘 보여주듯이 실제로 소피스트들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변론하는 재능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도덕의 파괴자로 간주되었고, 근대 이후 유럽에서 소피스트라는 말에 멸시의 의미가 붙어다니게 되었다. 아러한 주관적 진리의 한계때문에 우리는 주관성을 넘어서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향한다. 감각적인 것들이 허무한 환상이라면 시간이라는 유한적 상황을 뛰어넘는 객관적 진리는 인간에게 진정한 현실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한다.
인간 안에는 주관성과 객관성, 보편성과 구체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절대적인 일반원리와 이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독특한 취향과 삶의 방식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철학은 보편성에 촛점을 맞췄으며 주관성을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과연 주관성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까? 어떻게 주관성을 이해해야 그에 상응하는 진리가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주관성을 단순한 감각의 연속, 파편화된 개인적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편지리와 화합하지 못하고 극복해야 할 인간 존재의 모순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처럼 주관성을 개인의 내적 추구로 이해한다면 주관성과 객관성은 하나의 총체적 진리를 이룰 수 있다. 또한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서 주관적 진리는 인간의 삶과 모순되지 않는 실존적 가치가 된다. 우리가 주관적 진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과학의 진리와 다른 '어떤 다른 진실'이 과학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주관적 결정과 판단에 의해 인간의 인생이 변하기도 하고 의미를 얻기도 한다. 즉, 이 세계에서는 이성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논리적, 합리적, 객관적 진리가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직관으로 깨닫는 모순되고 비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진리가 있다. 시나 그림에서 만나게 되는 한 개인의 진심이 담겨있는 진리는 비록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철학적 사고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을 결정할 수 있으므로 객관적 진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