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철학은 현실적 효용성과는 구분되는 순수한 성찰로 간주되어 왔다.
감각적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자들의 경멸과 불신은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초월하는 절대진리를
추구하게 하였고, 철학에 있어 기술이나 물질의 영역은 순수한 이론의 고상함과 비교될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오랫동안 여져져 왔으며, 시쳇말로 '철학이 밥먹여 주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그 속성성 현실과는 분명한 거리감을 갖고 있는 학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철학이 현실에 기여한
공헌을 생각해도 그럴 것이다. 현대 사회는 생산성과 기술적 경쟁력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현대는 효율성과 이익이라는 관점을 그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세상이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란
숙고와 신중함이므로 모든 것이 바삐 돌아가는 현대생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경제발전과 개인의 실생활에 기여하지 못하는 철학적 관조는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인
학문, 혹은 부와 지식을 가진 자들의 여가활동 쯤으로 치부되는 것이 현주소인 것이다. 또한 철학이란
고대로부터 정신의 가치를 중시했기에 물신숭배와 배금주의 풍조가 만연하면 할 수록 사회나 학문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 추세인 것이다.
이렇듯 현실과 격리된 듯한 철학적 이론은 물질과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해진 근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과연 철학자들이란 상아탑에 머물면서 대중과 현실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인가? 사르트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은 행동하는 지식인이길 원했지만
사실 직접 현장에 참여하면서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철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어떤 외적 효율성도 추구하지 않는다"면서
철학은 철학 자체를 목적으로 함을 강조하였고, 칸트 역시 철학자가 권력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직접 정치에 참여할 때, 그의 이성은 부패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철학이 인간의 현실적 욕망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관조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경제적 이익과 실용성이 중시되는 세상에서 철학은 더 이상 필요없는 학문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자. 철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효율성과 생산성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서 오히려 철학적 사고는 더욱 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자들은 자유, 세계의 시초, 영혼의 불멸, 신과 관련된 질문조차 과학이 해결해 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수많은 분야에서 해결책을 제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숙제를 양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 의해 가능해진 출산법은 새로운 가족 모델을 제시받고 있으며, 이는 가족, 법, 개인
나아가 삶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기술의 남용, 유전공학, 안락사,
사형제도의 페지, 산업화로 인한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 등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은 철학적 논의와
토론을 요구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가치중립성과 맹목성을
특징으로 하는 과학은 반성작업을 통하여 연구의 한게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공해줄 의무를
갖는다.
마르크스는 철학이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만 치중해 왔음을 비판하면서 이에 철학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은 사유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항상 이상적인 현실을
목표로 한다. 철학은 항상 동시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철학적 반성이
객관성을 지니려면 얼마간의 초탈은 필수이다. 철학적 반성은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플라톤이 주장했듯이 진리란 즉각적으로 주어진 외양이 아닌 그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정의는 부정이다"라고 말했다. 즉, 긍정하기에 앞서 주어진 사실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방법적 회의론을 통해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과연 진리인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졌다.
철학적 사고는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을 비판했고,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근대 이성주의를 비판했다. 이처럼 철학자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현실에 대해 문제점을 제시하고 시대적 인기를 얻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대를 고발해야 하는 역할도
수행하여야 한다. 니체는 철학이 현실적 효율성이 없어 보이는 것은 그것이 시대를 앞서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일상적 친숙함과는 거리감이 있는 이러한 철학적 태도 대신에
편안하고 수동적인 스포츠나 공연 등 오락을 선호하며 복잡하고 이성적인 논거를 기피한다. 더우기
현대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옳다고 지지해 주는 아부성 이론을 좋아하며 안정을 깨뜨리는
반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정치가들은 대중들의 의견에 반하는 파격적인 구호나 개혁보다는
조심스럽고 관행적인 정책을 선호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대중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반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적 논지를 유지한다. 폴 니장은 철학대학 교수들이 현실 문제에 보다
깊이 관여하지 않고 철학사만을 가르치는 것은 지배이데올로기에 동참한 부르주아의 태도라고
비판했다. 가령 플라톤의 철학이 서구문명을 지배한 기독교 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프랑스 혁명에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사회주의 국가의
형성과 현대의 사회적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많은 빵을 제공해 줄 수는 있어도 각 빵 하나하나에 담겨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몫이다. 과학은 아무리 발전해도 가치중립적인
특성상 인간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궁금증을 채워줄 수 없으며, 수학적 공식과 경험적 실험을
벗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도 제공하지 못한다. 반면 철학은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문제들,
가령 사람은 왜 죽는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 왜 세상은 존재하는가,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즉, 실존, 죽음, 영혼과 같은 인간 숙명의 문제는 철학만이 답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동물이며,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이러한
의무들을 억제할 수 없는 유혹인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철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철학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거한 삶은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사고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지 지식 그 자체를 가르치는 학문이 아닌 점에서 과학과
구분된다. 즉, 철학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친다. 기술과 과학이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
성공과 쾌락, 금전적 이익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철학적 요구는 그 비례로 높아지고 있다. 즉, 과학적 성과를 윤리적 차원에서
고찰하는 노력은 결국 철학적 가치관과 연결되는 것이므로 철학적 사고는 현실적 필요라고 말 할 수
있다. 아무리 정보가 풍부하고 과학적 지식이 효율적이라 해도 그것이 지식과 삶의 목적 그 자체를
질문하는 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즉, 철학이란 행동의 목표에 대한 숙고이며 지식과 현실 총체에
대한 반성이다. 철학은 구체적 세계에 대한 성찰, 타인과 세상과 현상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하여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세상과 개인의 삶에 대하여 등대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미있는 자유와 행복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철학적 사고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공산품같은 아이들을 만들고 싶지 않고, 세상과 사물, 현상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내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철학서나 논리관련 책을 들게 해야 할 것이다.
관련서적
1.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著/이광래 譯/열린 책들 刊
2. 철학 읽어주는 남자/탁석산 著/명진출판사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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