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진리에 있어 주관성과 객관성의 경계는 무엇인가?

체 게바라 2006. 3. 27. 14:14

 

 

주관성이란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관성이란

자신의 개인적 입장에서 사물이나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반면 객관성이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확한 판단기준에 근거하여 사물, 사람 혹은 사건을 바라보는 제3자의

보편적인 관점을 뜻한다. 흔히 사람들은 주관성이란 이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 것이며

스쳐지나가는 연속적 감각과 느낌의 집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적인

느낌은 지속적으로 어떤 사실을 보장할 수 없다는 가정하에 주관적인 앎은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형상이 존재하는 세계만이 진리이며 환상세계와 경험세계는 모두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않는다고 보았다. 진리란 육체성을 배제한 영혼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으며,

수많은 감각의 흐름은 우리에게 보편적 무지만을 안겨줄 뿐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러한 플라톤의 전통을 따랐으며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개인의 수많은 감각, 순수한 지각에 대한

신임으로부터 확실성을 이끌어 냈다. 그들은 사물들이 내게 보여지는 것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령 바람이 불 때, 한 사람은 추위를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면 바람의 진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되게 된다. '감각은 항상 옳다'라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플라톤의<테아이테

토스>에서도 발견된다. '감각은 과학과 같고 항상 실재하는 대상을 갖고 있으며,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순수한 감각은 변하고 유동적이며 같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만 어떤 꾸밈이나 위조가 없기에 그 자체로 진리이다. 그들이 주장하듯이

진리한 무한한 감각의 연속이며 지금-여기에서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앎의 지침이 될 수 있을까?

진리란 감각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인식으로 정의되며 우리는 진리가 아닌 '진리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주관적인 것이 진리이다'라는 주장은 개인이 진리의 척도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은 인간의 시각은 모두 다르고

인간에 따라 진리는 상대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 경우 인간에 대한 고찰은 더 이상

보편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개개인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절대적인 선의 세계 '이데아'를 거부한 소피스트들을 언제나 옳고 바른 보편타당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리일 수도 있고, 저것이 진리일 수도 잇다'는 현대의 상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는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인데 어떤 논리가 만고불변의 표준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식이 포한되어 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옹호가 주변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우려하여 소피스트들은 개인의 특수한 의견을 존중하였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공동체 중심으로 사고햇던 국가주의적 공동체적 교육을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인 인본주의

교육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감각적인 주관성이 과연 진정한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소피스트들의 개인적 주관성에 대한

옹호는 심각한 회의론을 야기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리란 결국 관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데 더 이상 절대적 진리의 기준이 없고 변화하는 진리들만이 있다면, 그리하여

서로 모순되는 의견들만이 존재하고 모든 의견을 타당하다고 평가해야 한다면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존폐의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그 정의상 유일성, 보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인 것을 하나로 통합하고 변화하는 것들에게 통릴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진리의

본질은 이미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주관성 자체가 진리라면 돼지나 원숭이들도 척도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회의주의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들에 반대하여 보편적,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신임할 것을 권고했다.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사에서는 주관적인 것은 진리와 별개로 인식되어 왔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진리로 간주될 때 이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주관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절대 진리의 부정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주관적인 생각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면 근본적인 선이 부정될 것이고 모든 것은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한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보여주듯이 실제로 소피스트들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변론하는 재능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도덕의 파괴자로 간주되었고 근대 이후

유럽에서는 소피스트라는 말이 멸시의 의미로 붙어 다니게 되었다. 이러한 주관적 진리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주관성을 넘어서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향한다. 감각적인 것들이 허무한 환상이라면 

시간이라는 유한적 상황을 뛰어넘는 객관적 진리는 인간에게 현실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한다.

 

객관적 사고란 수학적 공식처럼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다.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과 학문에서

객관성은 이론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며 학자들은 개인적 주관을 이성적 추론을

통해 최대한 배제하고자 노력한다. 도덕 철학자들은 보편 도덕률을 설정해 어떤 예외도 없이

법률에 따라 책임과 도리를 다할 것을 개인에게 촉구했고, 과학정신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냉정한 분석과 관찰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과학적 관찰 역시 객관적인 것만은

아니며 가설 설정에 있어 과학자의 주관적 가치관이 개입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군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과학하는 방식'을 공유하는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지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신념, 가치관을 공유하는 과학자들은 같은 연구방법을 통해

그들의 공동체가 지지하는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이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 하여도 과학은 근본적으로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며, 최대한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