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리오 휴버먼

체 게바라 2006. 6. 21. 11:40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과거와의 대화는 진행 중이다. 책을 통해서, 강의를 통해서. 심지어는 인터넷과 텔레비전까지도 과거와의 대화를 주선한다. 역사에 대한 담론은 무성하게 펼쳐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지식의 파편들을 모아 머릿속에 ‘새로운 과거’를 조립한다. 그런데 사람은 왜 과거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역사가 크로체의 말을 빌어본다면 과거와의 대화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리라.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우리는 지금-여기를 알고 싶어서 인류의 일기장을 뒤적인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원제-Man's Worldly Goods)역시 지금-여기의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경제 이론-역사서이다.


이 책은 매우 친절하고 정직하다. 친절하다는 것은 단지 쉽고 재미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제 이론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특정 사건은 왜 발생하였는지를 설명하며 자본주의가 성장해온 과정을 꼼꼼히 밟아나간다. 정직하다는 것도 단순히 명쾌하고 확실한 사실을 나열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당시의 문헌들을 직접 인용하고 유명 인물들의 생생한 대화내용을 첨가하여 최대한 진실에 접근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란 승리자의 시각으로 재구성되기 마련인데 산업혁명 이후 성공을 거듭해 오던(물론 몇 차례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자본주의를 그 체제의 희생자인 노동자와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약자가 바라본 승리자의 영광은 추악한 탐욕에 휩싸여있었다.


김규항은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모른 채 살아간다고 탄식한다. 과연 그렇다. 착실한 축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온 자본가들은 그 찬란한 빛으로 포장된 세계가 결국은 우리를 빈곤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복음을 전파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전보다 넓어진 아파트가, 이전보다 잘 달리는 자동차가, 이전보다 풍부해진 먹을거리가 무엇보다도 강력한 증거물로 채택되어 선교의 최전선에 전시되면 자본이란 이름의 풍요의 신은 그 장엄한 모습을 현현하여 온 백성이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부의 장막 뒤에 숨겨진 탐욕과 오만을 알아차리고 대항하려 하지만 그의 덫은 가난과 무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이면을 알지 못했지만 놀랍게 적응했다. 그리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모순은 얄팍한 월급봉투에 가려진채 자본이 이끄는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사회’의 건설은 무리 없이 진행 되었다. 그리고 자본의 교세 확장은 지금-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 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경제학도로서 그동안 공부했던 경제법칙들을 의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움푹 파인 곳에 고이듯 가격은 수요 곡선과 공급곡선의 내리막을 따라 정확히 균형에 안착할 것이라는 나의 믿음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합리화일 뿐이라면, 신분은 사라지고 계급마저 그 본래 의미를 상실하여 누구나 노력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혹은 지배계급이 될 수 있다는-아름다운 희망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면, 인센티브incentive라는 세련된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끝이 안락과 풍요가 아니라 전쟁과 파멸이라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신과의 거룩한 관계 개선으로 추앙받는 종교개혁이 실은 종교가 경제체제 내로 흡수된 사건이었다는 것과 ‘자유·평등·박애’라는 감격스러운 슬로건의 프랑스 혁명이 농민과 빈민층들의 피로 얻은 과실을 부르주아들이 간단히 따먹은 결과라는 것은 신선한 충격쯤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칼 맑스가 밝힌 자본주의의 딜레마-수익성 회복과 구매력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그의 주장대로 자본의 평균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보여 마치 끝내 멈추어서는 안 되는 외나무 다리위의 자전거를 타고 있는 꼴이라면 우리는 그 위험천만한 길을 계속 가야 할 것인가? 근면과 저축이 우리를 부유케 하리라던 웨슬리와 칼뱅의 달콤한 약속은 일찍이 실현 된 적이 없지만(산업혁명 당시의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알아본다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겠으나 리오 휴버먼은 20세기 초반의 미국자료를 들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부채로 남아있을 뿐이다. 혹자는 ‘부자의 생각과 빈자의 생각’의 차이라며 열린 자본주의로의 진출을 장려하지만 노동자가 뿌린 씨앗을 누가 거두어 가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뿌린 씨를 폭군이 거두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책은 경제사를 훑어가며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써 맑스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의의를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측한다. 그런 면에서 18장-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이 책의 클라이맥스Climax이다. 맑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착취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잉여가치가 들어간-팔기위해 만들어진-물건을 상품이라 하는데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 된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상품, 즉 노동을 팔아야 하는데 여느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상품-노동-은 그것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총액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오직 그들 생계에 필요한 만큼의-굶어죽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식량을 구입하고 가끔 영화관이나 놀이공원을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임금을 받게 되지만 이는 하루 중 일부 노동 시간만으로 생산할 수 있다. 노동자가 스스로를 위해 일하지 않은 무보수 노동시간. 바로 그것이 잉여가치이며 이 잉여가치는 모두 사용자-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얻는 이윤과 이자 그리고 지대는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오며 이러한 잉여가치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착취의 척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는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소수의 대생산자가 다수의 소생산자를 죽인다. 집단적 노동의 결과인 생산 자체는 갈수록 사회화하는 반면, 소유는 개인화한다는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맑스는 혁명을 위해 부르주아의 동정과 지갑에 호소하지 않았다.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가장 고통 받는 노동자뿐이라고 생각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그의 말은 확실히 맞았다. 자본가들은 맑스의 주장-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 개선, 그리고 사유재산의 폐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치권력은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려 조직한 권력에 지나지 않다는 말에 높으신 양반들이 펄쩍 뛰었고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에 교회는 적그리스도Anti-Christ가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폭력혁명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확실한 근거를 얻게 되었는데, 노동운동에 대한 가공할 탄압이 이를 증명한다. 하긴, 도대체 폭력 없는 혁명이 존재하기나 할까!


이 위험천만한 생각은 민족주의로 범벅이 된 국가자본주의-우리가 익히 보아왔고 배워왔던 현실공산주의-에 의해 변질되고 빨간 색에 경기를 일으키는 지식인들에 의해 왜곡된 덕에 오늘날에도 가장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이념으로 취급될 뿐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윤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자본의 비열한 자기 확장 야욕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이 때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논하는 것이 그렇게도 터부시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일하는 사람들이 일한 만큼의 몫을 정당하게 받아 가겠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요구가 그토록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과의 만남으로 공산주의는 나에게 한 발짝 다가왔고 자본주의는 한 발짝 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는 가깝고 공산주의는 멀다. 누구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특히 오늘날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실재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이미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우리의 삶에 매우 적합한, 그리고 적응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세계는 20:80의 법칙이 지배한다. 우리는 20에 속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경쟁체제가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국가대표 축구팀의 선전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말로 들릴 것이고 내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이다.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닌 이윤을 위한 생산이 초래하는 비효율이란 모든 인간적 가치들을 자본에 종속시키고 확장 없이는 침몰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를 의심할 확실한 이유를 보았다. 끊임없이 수정되어 정교한 이론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주류 경제학이 자본의 집권을 정당화한 학문으로 전락할 가능성 역시 충분해 보인다.


책을 덮으며 ‘바로 알기’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엇인가를 바로 알았을 때야 비로소 그것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가능해 질 것이다. 그 평가는 때로 애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진중권이 말하길, 거대한 것은 분노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로 아는 것을 우려한다. 그들은 코코야자열매 속의 설탕을 손에 쥔 원숭이처럼 이윤극대화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다른 한 손으론 노동자의 절규를 꽉 틀어막고 있을 것이다. ‘바로 앎’이 가져다준 분노가 먼저 폭발하게 될지 아니면 똑똑한 원숭이가 코코야자의 구멍을 넓히는 방법을 먼저 알아차리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이 책이 처음 나온 1936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역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놀랍다. 역사란 역시 헤겔식 정-반-합의 연속선상일까?  아님 반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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