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종 드 히미꼬>
동성애의 모습은 같은 성질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없는 것을 혹은 아닌 것을 추구하는 방향은 아닐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메종 드 히미코>를 보니 더욱 더.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듯한 곳에서 사는 그들을 통해서. 뭔가 다른 욕망을 기대하는 하루히코. 하루히코의 모습은, 갈 수도 없으면서 세상이 가지 못한 곳을 밟고자 하는 그런 이상과 접목되는 것만 같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꿈꾸는 아이같은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래서 외로운 그가 쉴 집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그들의 아이성과 동성애를 이해주는 친구로서의 어머니 혹은 누이가 오면 좋을 곳이, 바로 메종 드 히미코가 아닐까? 자신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던 슬픈 눈의 어머니가 있길 바라는 곳이다.
그 꿈을 꾸는 그들은 꿈꾸는 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불구하고, 세상의 눈에 의해 만들어진 미추에 상관없이 꿈꾸는 이들같다. 달성여부에 상관없이 꿈꾸는 이들같다. 아름다운 것, 제 자리에 꼭 들어가 있는 것만 아닌, 여기 아닌 것,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는다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추구하련다가 될까? 몸은 크고 우락부락 해보이는데, 자태는 여성이고 싶은 삶을 보면 슬프지 않은가. 마법이 필요한 그들을 보면 말이다. 남자인데도 여자인 척, 늙은 남자인데도 어린 아이처럼. 현실과 환상과 꿈을 구분하기 싫은 사람들, 실제와 환상에 대한 구별을 하기 싫은 그들을 보면 말이다. 그 꿈에 자신의 날개가 녹아도 괜찮은 사람들 같다. 마법의 주문, 피키 피키 피키!를 믿는 사람들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동성애자, 이성애자의 분류란 무엇일까? 분류란 왜 하는 것일까? 역시 그 기저에는 자타만 있는 것인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정말은, 있고 없고만, 살고 죽고만 분명할 터인데, 사이의 인간은 자타를 구분하고 편승한다. 때론 현명하게, 때론 어리석어 보이는 편 가름에.
영화는 잠깐, 동성애와 동심을 함께 놓아 편 가름을 없애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다수성에 의해 규정된 집단의 본성은 아닐 듯하다. 그래서 동성애자는 오늘도 소수의 자리에서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사랑의 화살표를 그려본 적 있는가? 한 곳에 10명의 남과 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모두 1대 1로 만나면 좋으련만, 사랑의 화살표는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몰려있던가, 아님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로 이어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1대 다수라면 남은 수들끼리 다시 재조정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A는 B를, B는 C를, C는 D를 이렇게 되면, 그때 그곳은 사랑의 아픔 공연장이 된다. 물론 이 눈물의 공연장은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잊혀 지면, 다시 또 재조정에 들어간다. <메종 드 히미코>를 보면서 이 사랑의 화살표가 생각됐다. 어머니, 히미코, 하루히코를 보면서, 사오리, 하루히코, 호소카와를 보면서. 사오리의 울음은 그런 자신에게 올 수 없는 화살표를 알면서 화살표가 가는 것에서 기인한다.

왜 집일까? 행복이 내재된 집에서 살고 싶은 그들. 그들만의 꿈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인정의 문제로 가본다. 게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기인식이 있다면, 대개 동성애자의 삶을 지향하는 개인은 집을 나온다. 세상과 괴리되어 자신들만이 살 수 있는 곳에서 살게 된다. 그런 게이들 중 한 사람 히미코가 ‘히미코의 집’이라는 집을 지었다. 왜 집일까? 여기에서 집은 가정이기도 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즐거운 나의 집, 즐거운 우리 집이다. 세상의 눈에 보호되는 포근한 집이다. 아이처럼 연약한 그들을 감싸주는 그런 집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아니 하나의 답을 듣게 된다. 그들은 집을 나간 것은 집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인정해주는 집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이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것은 여자와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정체성 때문이지, 집이 싫은 것은 아니다. 집을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원하는 가정은 어떻게 꾸려가게 될까? 남과 남으로도 가능한 가정을 인정해준다면 그때 가능할 것이다. 자신을 그대로 인정해준다면, 그때는 가능할 것이다. 그때는 그들도 가정을 지키게 될 것이다. 흔히 게이라면 욕망의 문제, 즉 이기주의자 호모로 규정해버리는 게 다수의 시선이다. 오직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가정도 버리고, 혼자 나가서 자기 뜻대로 살아간 사람들로. 이기주의자라는 단정으로 바라본 동성애자들의 모습은 나아가 욕망의 문제로만 접근해버리는 사례를 만들기도 한다. 여성과 남성이 만약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이라는 끈이 없다면 남과 여 또한 욕망의 문제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남과 여의 문제에, 결혼이라는 제도, 아이라는 구심점을 만들어져 있기에, 욕망 이외의 여러 가지 요인들의 가미되는 것이다. 타자로부터 발생되는 일자의 욕망에서 자기중심성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욕망은 자기 욕망이지 않을까? 관계에서 사랑이 먼저라기보다는 관계 속으로 욕망이 먼저이지 않을까? 우린 매번 그걸, 잊는 것 같다. 그리고서는 욕망을 질책한다. 왜 그리 자기중심적이냐고, 사실 자기중심적이어야 가능한 욕망에게 말이다.
히미코를 만나기 전까지 ‘늘 혼자였어’라는 말에 ‘사오리상 나는 지금도 혼자야’라고 말한다. 혼자는 다른 혼자들과 더불어 혼자들을 감싼다. 아니 잠시 잊게 한다. 오래 간직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집이 된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
서로 다른 삶에 대해 누구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어린 학생의 동화됨을 봐도 그렇고 말이다. 다른 성적 취향이지만 서로 호흡할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러니 문을 닫을 여건이라면 상관하지 말고서 문을 닫고, 이웃해 문을 열 상황이라면 이해의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성적 취향은 그 사람이 가진 여러 취향 중 단지 하나의 취향일 뿐이라는. 그것에 너무 크게 취향 기준을 들이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메종 드 히미코'는 너무 예쁘다. 너무 천진난만하다. 인간의 본성이 꼭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예쁨에, 그 천진난만함에서 오해는 이해로 갈 것이다.
영화는 이런 얘기다. 1958년 긴자 거리에 히미코라는 게이바가 생겼다. 그곳은 게이만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문화계 전반적인 인사들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교류가 활발하던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1985년 그 바를 운영하던 마담이 간경화로 은퇴하게 된다. 그러자 어디선가 혜성처럼 나타난 요시다 테오루라는 남자가 게이바 '히미코'를 인수하게 된다. 그 역시 수완이 뛰어났다. 그렇게 잘 운영되던 히미코라는 바가 2000년 갑자기 눈을 닫았다. 그후 어느 해변에 '메종 드 히미코'라는 호텔이 생겨났다. 바의 히미코의 마담이 운영하는 요양원 혹은 실버타운이라 할 수 있다.
‘메종 드 히미코’, 즉 히미코의 집은 게이들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집이다. 그곳은 어떤 나이든 사람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그곳을 운영하던 히미코가 암에 걸려 생의 끄트머리게 놓여있다. 그 히미코에게는 딸이 있는데, 히미코의 연인이 하루히코가 딸에게 찾아와 암으로 죽어가는 히미코의 집에서 와서, 히미코를 봐주길 바라고 있다. 게이인 아버지를 이해해주길 바란다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기에 앞서, 우선은 보고서, 그리고서 이해되면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암에 걸려 돌아가신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진 빚 때문에, 돈 때문에 사오리는 히미코의 집을 찾는다. 사오리에게 그들은 낯설어,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다. 낯설어서 모멸감을 주었던 그들이지만, 차차 그들 또한 다르지 않은 인간이더라를 알게 된다. 성적 취향만이 다를 뿐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경멸받는 게 이해되지 않아, 사과하라고 말하는 사오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어머니와 유사한 전철을 밟게 되기도 한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간이 됐다기보다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인정하는 소리, "네가 좋단다"라는 말을 듣게 된 상황까지 가게 된다. 사오리에게 그남자가 아버지가 될 시간도 머지않아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아버지인지도. 아마도. 그 과정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외상으로 인해 동성애에 대해 결코 무관심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원한감정이 있었던 한 사람마저도 그들을 이해하게 되더라,가 <메종 드 히미코>의 내용이다.
이해가능성으로부터,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알게 된 어느 해 여름이야기가 아닐까?
영화는 빛을 투사해 사람'들'에게 인식하게 한다. 그것을 통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계몽이 될 수도 있고, 감동할 수도 있다. <메종 드 히미코> 역시 그런 계몽과 감동을 함께 안겨주는 영화다. 늘 변화하는 인간인 우리 혹은 당신들은 혹 너무 고정된 틀로만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개인적인 취향에 관심 없다고? 그럼 다행이고, 라는 듯. 오해했다고? 그럼 바꿔봐, 라고. 삶에 있어 늦은 것은 지금 시작하면 되는 거라고. 영화는 분명 나지막한 물결이고 운동이다. 어디 영화만 그러겠는가는.......
^^뱀발^^
조제, 물고기... 이후 이누도 잇신 감독의 두번째 작품을 만났다.
게이, '동성애자'라는 이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보내는 잇신 감독의 따뜻한 시선은 집과 가족도
결국 사회의 편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의 앵글이 그들을 감싸안는 수고를 대신한다.
그들은 가족도 집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기에 불가분 밖으로 떠도는 부초들이다.
세상으로부터의 멸시와 경멸을 받는 대상인 이들에게 결국은 이웃들인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 영화는 자문하게 한다. 그리고 오다기리 쪼, 녀석의 멋스러움은 같은 남자로서 실로
부러웠고, 우리나라 배우 중에서 대적할 만한 배우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 다니엘 헤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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