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서평> 팰릭스 가타리의 <욕망과 혁명> 윤수종 譯

체 게바라 2006. 10. 16. 16:45

 

 <서평>
펠릭스 가타리, 윤수종 편역, "욕망과 혁명", 문화과학사, 2004. (진보평론 22호에 게재)

아주 특이한 ‘프로이트맑스주의’ 서관모(충북대학교 교수/사회학)

 

가타리와 네그리를 정력적으로 소개해 온 윤수종 교수가 가타리 저작을 또 한 권 편역하여 출간하였다. 이번의 편역서 '욕망과 혁명'은 실린 글들의 주제 및 집필시기의 면에서 보면, 편역자 자신이 말하듯이 가타리의 '분자혁명'(1977: 윤수종 역, 1998, 푸른숲) 제2권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가타리(1930-1992)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년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니 태생이 투사인 셈이다. 그는 1953년이래 라캉의 세미나에 참여하고 파리 프로이트 학파에 참여하였으나 6·8운동 과정과 그 이후에 라캉의 정신분석이 새로운 흐름을 반동적으로 회수해 가는 것을 보고 정신분석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감지하면서 라캉에게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가타리가 라캉과 결별한 뒤 1969년 들뢰즈를 만남으로써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형이상학’이라고도 불리는 노마돌로지가 탄생한다. 6·8 혁명 이후 대중의 다양한 욕망분출에 주목하고 ‘욕망의 미시정치’를 제기한 가타리의 정치노선을 요약하는 단어가 ‘분자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그는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한 혁명적 실천을 기계적 작동과 욕망해방이라는 방향으로 바꾸어나가고자 한다. 가타리의 '분자혁명'(1977)은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전통에서 빌헬름 라이히와 허버트 마르쿠제의 뒤를 잇는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받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과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80) 사이의 저작이다. 들뢰즈와의 공저들이 좀더 철학적인 저작이라면 "분자혁명"은 좀더 정치적인 저작으로, 가타리의 실천적, 정치적인 노선이 잘 드러나는 저작이다. 1980년에 가타리는 1977년 3월 볼로냐 반란으로 촉발된 이탈리아의 상황에 관한 글들과 욕망의 미시정치에 관한 글들, 그리고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글들을 첨가하여 "분자혁명" 제2판을 간행한다. '욕망과 혁명'은 이 "분자혁명" 제2판에 추가된 글들을 중심으로 편집되어 있다.

 

5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는 '욕망과 혁명'의 제1부 “욕망과 혁명”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른바 ‘역사적 대타협’에 반대하여 ‘노동자 아우토노미아’가 주도한 이탈리아의 볼로냐 반란(1977년 3월)과 그에 대한 탄압이 있은 지 몇 달 뒤 아우토노미아 활동가인 베르테토 및 비포와 행한 대담 기록이다. 대담자가 맑스주의자인 아우토노미아 활동가들이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 노동자운동, 조직문제 등에 대한 가타리의 생각, 그리고 분자혁명과 전통적인 혁명과의 관계에 대한 가타리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예컨대, 노동자계급은 “혁명과정의 주체”이지 “여성, 동성애자 등의 옆에 있는 많은 혁명주체들 가운데 하나”라고 믿지 않는다는 비코의 주장에 대하여 가타리는 현실의 노동자계급은 개량주의적, 경제주의적이라고 단언한다. 가타리는 노동자 주체성에 대하여 ‘주체적 기계적 배치들, 탈 중심화된 주체화 형식들’을 대치시키고, 국가권력 장악을 목표로 했던 종래의 혁명 모델에 ‘분자 혁명’을 대치시킨다. 특이하게 제2부는 가타리가 주도한 잡지 '르셰르슈'[탐구] 동성애 특집호(1973)에 실린 어느 동성애자(게이)의 글 '똥꼬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또 한 사람의 무명씨의 글 '신체에 대한 압살을 끝장내기 위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제3, 4, 5부는 대부분이 "분자혁명"초판(1977) 발행 이후 쓰여 제2판(1980)에 수록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3부 “유럽에서의 탄압/폭력과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는 볼로냐 반란 및 그에 대한 탄압과 관련한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제4부 “욕망의 미시정치”에는 '욕망 해방', '욕망은 역능, 역능은 욕망' 등 욕망의 미시정치와 관련한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제5부 “분자혁명과 계급투쟁”에는 '권력구성체의 적분으로서 자본', '지구계획' 등 분자혁명과 관련한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분자혁명"(1977, 1980)은 1969년의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이래의 뜨거운 70년대 유럽이라는 배경 속에서 나온 저작이다. 가타리가 ‘忍冬의 세월’이라 부른 80년대 들어 네그리는 아우토노미아 이론가 네그리와 접촉하고 "자유의 새로운 공간"(1985년: 이원영 역, 갈무리, 1995)이라는 공저를 내기도 한다. 다른 한편 80년대 들어 생태운동에 가담한 가타리는 자신의 분자혁명적 사고를 생태학적 틀 속에서 확장해 나간다(1989, "세 가지 생태학", 윤수종 역, 동문선, 2003). 이러한 변화, 발전 이전에 간행된 "분자혁명"은 가타리의 정치노선인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내 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욕망과 혁명"이 출간됨으로 해서 "분자혁명"이 온전히 소개된 것이다.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에게 혁명이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의 문제라면 가타리에게 혁명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문제이다. 파시즘은 거시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세포적 수준, 분자적 수준에서 작동한다. 그리하여 "분자적 수준에서 미시파시즘과 싸우는 한에서만, 마시파시즘이 거대한 정치집단들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혁명에 대한 가타리의 논의는 분자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대중의 혁명적인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혁명이란 모든 소외관계―노동자, 여성, 어린이, 성적 소수자의 소외, 색다른 감수성이나 소리·색채나 사상의 기호(嗜好)의 소외―와 절단하는 문제”로서, “어떤 영역에서도 혁명은 먼저 혁명에 의해 욕망에너지의 해방이 있어야 한다”. 분자혁명은 “욕망에서 출발하여 욕망을 준 예술적으로 새롭게 형성”하는 혁명이며, “자신의 신체, 자신의 감각, 감수성, 성애의 재전유”로서 “분자적 구성요소들의 일종의 자치실행”이다.("욕망과 혁명", 26쪽, 30쪽). 이러한 분자혁명의 관점에서 가타리는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욕망 이론의 첫 번째 임무는 프로이트 이래 전개되었던 사적인 정신분석 치료라는 의사(擬似)신비주의적 실천을 승인하는 것보다는, 사회적 장으로 돌파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상관적으로 현재의 계급투쟁을 담지하고 있는 어떤 이론도, 그런 투쟁이 욕망하는 생산과 대중의 창조성에 개방되도록 하는 데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형태에서 욕망을 결여하고 있으며, 관료주의와 인간주의로 경도됨으로써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 반면 프로이트주의는 처음부터 계급투쟁과 관계가 없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무의식적 욕망을 지배질서의 가족적이고 사회적인 규범에 수갑을 채운 채 속박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무의식적 욕망과 관련된 초기의 발견을 왜곡했다.”("분자혁명", 33쪽).

 

“혁명적 노동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계급투쟁 수준에서 표면상의(apparent) 세력관계와 대중의 현실적인 욕망투여 간에 어긋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생산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종하는 동시에, 피착취자들의 욕망경제 속에 스며들어갑니다. 따라서 혁명투쟁을 표면상의 세력관계의 수준에만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혁명투쟁은 자본주의에 오염된 욕망경제의 모든 수준(개인, 부부, 가족, 학교, 활동가집단, 광기, 감옥, 동성애 등의 수준)에서 전개되어야 합니다.”("분자혁명", 45쪽). 이 분자혁명은 분자적이지 않은 혁명들, “사회적, 경제적 혁명”과(80년대에 와서는 “생태적 혁명”과) “결합되고 접속되는 영구혁명”이다. 양자의 결합 일반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가타리의 프로이트맑스주의는 라이히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발리바르의 평가대로, 라이히의 프로이트맑스주의(즉 맑스와 프로이트의 종합)는, 196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세기 말에 시작되고 1930년대 전면화된 맑스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정당한” 것이다. 라이히의 프로이트 맑스주의는 맑스주의의 맹점, 즉 “‘계급의식’이라는 그 자신의 신화, 그리고 또 상관적으로 그 스스로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에 대한 그 자신의 몰이해와 부인”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즉 맑스주의의 “자신의 존재조건들에 대한 ‘의식’과는 구별되는 대중의 정서적 또는 감정적 구조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대한 부정, “따라서 계급적 조건과 대중의 운동들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편차에 대한 부정”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정당”하다(에티엔 발리바르, '프로이트맑스주의의 교훈', "문화과학" 3호, 1993). 역사유물론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라이히가 도입하는 것이 ‘성 경제’ 즉, 계급투쟁과 성욕의 본원적인 통일성이라는 요소이다. 이러한 통일화의 사고방식은 라이히의 프로이트맑스주의를 “필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기에 따라 다양한 조류들이 구별되어야 하지만 프로이트맑스주의는 공통적으로 총체화의 유토피아를 내포한다. 루디네스코의 표현대로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하나의 총체성으로 생각하게 되는 자멸적인 실패의 징후”일 것이다(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역사', "문화과학" 3호).

 

다른 프로이트맑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맑스를 나름의 방식으로 결합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경제와 욕망경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본에 봉사하는 이론가의 임무”이며, 사회적 생산과 욕망의 생산(욕망하는 생산)의 이분법은 “여성, 어린이, 마약중독자, 알콜중독자, 동성애자 등에 대해 가족주의적 억압이 작동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혁명투쟁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 가타리는 이러한 투쟁에 대하여 ‘미시적 계급투쟁’, ‘미시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계급투쟁과 욕망투쟁 가운데 가타리가 중점을 두는 것은 욕망투쟁이다. 그는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정치경제 쪽에서보다는 욕망의 집합적 배치 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대규모 계급투쟁을 욕망투쟁 뒤로 미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분자혁명", 95쪽, 219쪽). 그러나 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맑스의 종합, 즉 총체화를 거부하는 특이한 프로이트맑스주의자이다. 이 점에서 그는 라이히, 마르쿠제는 물론 프로이트맑스주의자였던 초기 알튀세르와도 구분된다(알튀세르 역시 이데올로기의 일반이론의 구성이라는 총체화적 시도를 하지만 결국 이러한 총체화적 기획을 포기한다). 그러면 가타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프로이트와 맑스를 결합하는가? 가타리는 이론적 언표를 소비하는 두 방법 가운데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취하거나 버리는” “대학의 방법”에 “자신에게 편리하게 텍스트를 조작하고, 자신의 좌표를 밝혀주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지시하도록 사용하면서, 텍스트를 취하면서 동시에 버리는” “정열적 애호가의 방법”을 대치시킨다.

“유일한 문제는 텍스트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에 항상 생생한 것은 그 언표의 일관성이 아니라, 절단된 언표행위, 즉 그 이론이 헤겔주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 강단심리학, 현대 정신의학 등을 일소하는 일정한 방식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라는 두 분리된 신체의 연접(conjonction)이라는 생각 자체가 시각을 왜곡한다. 해체된(dépecé[잘게 자른]) 마르크스주의의 조각들은 욕망에 기초를 둔 이론이나 실천과 함께 나아갈(concourir à) 수 있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해체된 프로이트주의의 조각들은 계급투쟁에 기반을 둔 실천과 함께 나아갈 수 있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분자혁명, 33쪽).

 

가타리는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의 체계를 버리되 그 해체된 조각들을 자유롭게 함께 사용하는 방식으로 프로이트와 맑스를 활용한다. 1978년에 와서도 그는 “혁명적 변혁의 전망”이 완전히 가능함을 주장하면서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1) 일상생활투쟁, 욕망투쟁, 2) 전통적인 노동자계급투쟁, 3) 민족해방투쟁 및 소수민족해방투쟁”을 “발전시키고 쇄신하고 접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욕망과 혁명, 339쪽). “번개와 같은 가타리”(들뢰즈)의 사고는 논리적으로 엄격하다기보다는 이렇게 분방하다. 70년대 말의 노동자운동과 관련하여 “거대한 탈주운동”, “고삐 풀린 욕망의 대중적인 분자적 변이”에 대하여 말하는 가타리가 동시에 ‘전통적 노동자계급투쟁과 욕망투쟁의 접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터인데, 단적으로 노마돌로지의 경전이라 할 들뢰즈, 가타리의 공저 "천개의 고원"에는 계급투쟁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분방함이 바로 가타리의 매력이다. 욕망, 성욕이 계급투쟁 못지 않은 물질성을 지니고 있음을 승인하며 계급투쟁과 “그 물질성이 또 다른 장면(예컨대 무의식) 위에서 발휘되는 바의 과정들”과의 접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발리바르의 경우와 대비시켜 보자.

 

“마르크스주의(알튀세르를 통하여)와 정신분석학(라캉을 통하여)에 대한 이중적 준거에 의해 교육받은 우리들은 이 두 개의 이론들의 종합, 즉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구조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쇄신된 새로운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합니다 …… 지금 나는 이 두 개의 문제설정들 각자가 다른 것에 의해 연구되는 어떤 규정들을 일정하게 ‘괄호 속에 넣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하는 만큼 그러한 종합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에티엔 발리바르,"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365쪽).

 

발리바르는 다만 “나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제기되는 질문들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서로에게 작용하게끔 한다”고 말할 뿐이다. 가타리와 비교하면 얼마나 소심해 보이는가! 반면 처음부터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의 ‘종합’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가타리는 얼마나 대담하게 양자를 활용하는가! 양자의 종합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본다면 가타리는 사실 프로이트맑스주의자가 아니다.
“국부적이고 미세한 욕망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점차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문제삼아라”라는 자신의 ‘강령’(분자혁명, 142쪽)에 대한 가타리의 충실도를 잘 보여주는 글들이 욕망과 혁명 제5부의 글들, 특히 권력 구성체의 적분으로서의 자본과 지구계획이다. 편역자는 이것들을 각각 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와 제국의 내용을 선취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나로서는 가타리가 목적론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을 들뢰즈의 동업자이자, 또한 적어도 어떤 면에서 분명한 목적론자인 네그리의 동업자일 수 있었다는 것이 약간 의아할 지경이다.

 

네그리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의 최고 단계로 출현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분업을 전도시킨다는 ‘사회적 노동의 지식화’라는 현상에 주목하며, 그것으로부터 “‘사회적 노동자’의 ‘의식화’를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의 조직화의 종말목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결론, 즉 마르크스주의적 진화주의를 강화시키는 결론을 도출한다.”(발리바르,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 1998). 이러한 진화론은 보완물로서 결단론을 수반한다. 다른 면에서는 변증법에 대한 적대자인 네그리가 여기서는 맑스의 변증법적 저작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의 ‘일반적 지성’에 대한 논의에 의존하는데, 가타리 역시 맑스의 같은 저작에 의거하여 자신의 진화론을 전개한다.

 

“자본주의의 기계적 제어는 …… 자신의 효과를 전도시키고 맑스가 완전히 감지한 새로운 유형의 기계적 잉여가치를 밝히는 데 이를 수 있다.(인간종족의 가능한 감속, 인간의 욕망이나 창조성의 지평의 끊임없는 쇄신.)”. “자본가계급은 모든 인간활동을 자신의 기호망에 입각하여 유일하게 교섭가능한 등가물로 전면적으로 전환하려는 자신의 기획에서 어떤 한계에 부딪치는가? 그러한 전면적 침투체계 속에서 혁명적 계급투쟁을 어느 정도까지 구상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 한계는 전통적인 혁명운동을 오래 전부터 괴롭혀 온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혁명은 외관상 명백한 정치적 담론의 수준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욕망의 변화와 과학기술적 예술적 변화의 측면에서 훨씬 분자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 현재의 자본주의는 자신의 힘의 정점에 이르고 있지만, 아마도 동시에 극단적인 취약지점에 이르고 있다.("욕망과 혁명", 319쪽, 322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가타리가 네그리와 교류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진화주의적 도식에서 훨씬 더 자유로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을 욕망경제의 견지에서 분석하려 하는 가타리보다 “몰적, 가시적, 대규모 혁명이 욕망경제를 포함한 분자혁명들의 확대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라든가, “앞으로 다가올 사회혁명은 따라서 분자적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진술에서 멈추는 가타리가 더 가타리답다. 욕망경제와 정치경제의 총체화적 분석과 자본주의의 발전경향에 대한 진화론적 파악은 모종의 혁명적 낙관주의에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혁명적 변혁의 전망은 완전히 가능하다.” "욕망과 혁명", 339쪽). 그러나 이론적 근거가 박약한 낙관주의보다는 그람시의 ‘지성의 비관주의’가 낳을 것이다. 혁명적 수사로 가득 찬 네그리의 변혁이론에는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가 스며 있다. 그에 비해 가타리의 ‘분자혁명’ 이론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것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분자혁명 이론은 모든 종류의 혁명적 공산주의자에게 우회 불가능한 이론적 기념비이다. 이 이론의 온전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욕망과 혁명"의 출간은 기쁜 일이다.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구하여 편역한 윤수종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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