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자유에의 길-칼 마르크스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著/ 정명목 譯/푸른숲 刊

체 게바라 2006. 3. 24. 14:42

 

 

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남부 트리에르에서 유태인 변호사인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프레스부르크 출신의 헨리에테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와 문학, 철학에 심취했으며 점차 아버지의 바램인 법학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즉 마르크스에게 있어 진리를 향한 길은 이미 '법학'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벗어남은 아버지의 우려대로 순탄하지 못한 삶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에게 시련은 명예로운 면류관에 불과했다. 보통 사람들은 벗어남, 혹은 어긋남을 비난한다. 기존의 제도와 가치를 비판하거나 주어진 정답에 회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는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을 사람들은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이론의 주창자들이나 사회 변혁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끊임없는 박해와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분명 평탄하게 사는 길이 아니다. '평탄'하게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가치와 제도를 그대로 수용한 채 사는 것이다. '어긋남'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본질적으로 옳은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렇게 살 수 없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공격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는 이처럼 변호사라는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미래를 버렸지만 그의 '벗어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 '교수직'을 버리는 선택을 감행했다. 그는 23살인 1841년 4월 15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의 절대 왕정은 민주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교수로 뽑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맞물려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었던 브르노 바우어가 대학에서 추방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교수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교수직 대신에 자기가 추구해 왔던 인류를 위한 구도의 길을 단호하게 선택했다. 그로부터 마르크스의 인생에서 '비난'과 '박해' 그리고 '고립'이 뒤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코 한 순간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이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17세에 쓴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논문인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보편적인 것을 위해 활동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고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을 역사에서 가장 해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세상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던 사람을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한다." 아울러 그는 인류를 위해. 사람들이 좀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자신의 각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만일 우리가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기로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면 어떠한 시련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시련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잠시 동안의 희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소하고 한정적이며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삶의 자취는 조용히,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며, 타고남은 재는 고귀한 인간들의 반짝이는 눈물로 적셔질 것이다.

 

마르크스가 교수의 길을 접고 대신 선택한 것은 잘못된 제도와 가치, 허위적인 의식들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비판하는 저널리스트의 길이었다. 1842년 1월, 검열제도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글을 <독불연보>에 기고하면서 마르크스는 본격적인 비판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사람들이 마르크스에 는 기대는 매우 컸다. 마르크스는 이미 베르린 대학 시절부터 급진적인 비판을 전개했던 청년 헤겔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헤겔학파 사람들이 모이는 '박사클럽'에서 자주 활동했으며, 그들보다 대략 8살이 어렸지만 누구 못지않게 토론과 논쟁을 주도했다. 1842년 가을 마르크스는 약관 24살의 나이에 퀼른에서 창간된 시민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반정부 기관지인 <라인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것은 나이에 비해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모제스 헤스는 친구 베르톨트 아우어 바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는 물건일쎄. 그는 나에게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주었지. 간단히 말해, 현세대 최고의, 또 어쩌면  유일하게 진짜일지도 모르는 철학자를 만날 준비를 하게. ................마르크스(이것이 나의 우상의 이름일세) 박사는 아직 젊은 사람이라네. 기껏해야 스물 넷 정도일 걸세. 그는 중세의 종교와 철학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걸세. 그는 가장 심오한 철학적 진지함과 가장 신랄한 재치를 겸비한 인물이라네. 루소, 볼테르, 홀바흐, 하이네, 헤겔을 합쳐서 - 나란히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합쳐 놓은 세. - 한 사람을 만든다면 그게 바로 마르크스 박사가 될 것이라네. 

 

이것이 당시 마르크스를 만난 사람들이 그에게서 받는 일반적인 인상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편집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편집장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843년 4월 1일 프로이센 정부는 마르크스가 편집장으로 있는 <라인신문>을 강제로 폐간시켰다. 마르크스는 신문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항의하는 표시로 "본 서명인은 정부의 검열로 인해 <라인신문> 편집부에서 오늘 자로 사직했음을 알림"이라는 공고문을 3월 18일자 신문에 공식 게재하였다. 정부의 강제 폐간 조치를 조롱하는 당시의 만평에 나온 그림에서 마르크스는 '프로메테우스'로 형상화 되었다. 이 그림을 보면 마르크스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인쇄기에 묶여 있으며 마르크스의 가슴을 쫓는 독수리는 프로이센의 군주를 나타내는 왕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되고 싶어했던 모습은 아니었을까? 공교롭게도 이미 마르크스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에서 모든 철학자는 진정한 철학을 고백하는 한에 있어서 프로메테우스를 신봉해야 한다고 선언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심장에서 단 한방울의 피라도 고동치는 한, 철학은 에피쿠로스와 함께 반대자들에게 계속해서 외칠 것이다. 철학은 그것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고백 ,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모든 신들의 무리를 증오한다." 이것은 최고의 신성으로서의 인간의 자기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신들에 대한 철학 자신의 고백이며 선언이다. 어떤 것도 그것과 나란히 존재할 수 없다. 명백히 악화된 철학의 시민적 지위를 기뻐하는 3월의 토끼들에게 그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에게 답했던 것처럼 이렇게 답할 것이다. "당신에게 강제되어 있는 나의 불행한 상황을 바꾸지 않겠다. 분명히 들어라! 결코 바꾸지 않겠다! 아버지 제우스의 충실한 사환이 되느니 차라리 이 바위의 노예로 살리라." 프로메테우스는 철학의 달력에서 가장 고귀한 성자이자 순교자이다.

 

"모든 신들의 무리를 증오한다"는 프로메테우스의 고백은 정확히 마르크스의 고백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오해되듯이 종교 일반에 대한 강제적인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가 인간의 자의식과 자유를 억압했음을 폭로한 것이다.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운명과 목적을 결정하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 종교에서 인간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요받아 왔으며, 이를 이용하여 신의 이름을 대행하는 자들은 지배자로써 다수 대중을 억압해 왔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제우스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부하고 인간을 만들고 인간을 위해 천상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 주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비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 종교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포이에르 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란 인간의 자연성에 근거한 것으로서, 소외된 형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신이란 인간 종족들 사이에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성에 기초한 사랑이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적 실체로 향상화 된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 바하가 신학을 인간학으로 천상을 지상으로 대체시켰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문제는 어떤 종교인가가 아니라 종교는 단지 '인간적인 관계의 소외된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다. 당시만 해도 마르크스는 포이에르 바하의 주장에 따랐다.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그가 쓴 김나지움의 졸업논문에서 드러나듯 괴테를 비롯한 당시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곧 마르크스는 포이에르 바하의 '종교비판'을 '종교의 완성'이라고 비판한다. 즉 포이에르 바하는 '사랑'을 인간 자신의 불변적인 자연성이라고 주장하므로서 인간의 감성을 고정적인 실체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애초 의도했던 '종교비판'과 달리 포이에르 바하는 참사랑의 종교를 실현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그가 추구한 자유와 평등에의 정신은 인류가 지속하는한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

 

*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著/ 정명목 譯/푸른숲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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