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성과 무상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사이의 존재관계를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기술하고, 이를 토대로 철학상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는 것, 이것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내세우고 잇는 목표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이 두 존재에 관한 존재관계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론에 만족할 만한 답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빈틈을 메우기 위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가 아닌 또 하나의 존재를 문제 삼고 있는데, 이것이 곧 타자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사르트르는 자신의 존재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이 세계의 존재를 인간과 사물의 두
영역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범주를 다시 '나'와 '터자'라고 하는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타자를 나의 대타존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존재 영역- 따라서, 존재의
제3영역-에 속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존재론에서 특히 타자가 차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예로 들고 있다. 혼자 있을 때도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누군가의 옆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가령 내가
야비한 행동을 했다고 치자. 이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행동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가 그 하나이다. 이 경우레 나는 그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인 경우이다. 이 경우에 나는 첫 번째 경우에서보다 더 절실하게 나의 행동의
야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처럼 수치심은 '타자 앞에서 내가 나에 관해 갖는' 의식이라는 이중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 두 구조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사르트르는 대타존재의 문제를 크게 '타자의 존재에 관한 문제'와 '나와 타자와의 관계 문제'로
구분하고 이 두 문제를 '존제와 무'의 제3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르트르는 대타존재의 두 가지 문제 가운데 첫 번째 문제인 타자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시선'의 개념을 도입한다. 사르트르는 또한 이 개념을 통해 '타자'는 원칙상 '나를 바라보는 자'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정의는 외관상 간단하게 보이지만 사르트르가 이 정의에 도달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철학사상 타자의 존재를 문제삼았던 헤겔,
훗설, 하이데거 등의 이론을 주로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이론이 '유아론'-실재하는 것은 오직
자아와 그의 의식뿐이며, 다른 것은 자아의 관념이거나 자아에 대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철학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가하면서 타자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여러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 조건들 하나하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제시하는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제1조건 : 타자의 존재는 개연성일 수 없다.
제2조건 : 코기토(Cogito)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제3조건 : 타자는 먼저 객체일 수 없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인식관계가 아니라 존재관계이어야 한다.
제4조건 :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내부 부정의 관계이어야 한다.
제5조건 : 타자는 신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