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사평 역에서/곽재구

체 게바라 2007. 1. 7. 17:00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고통스런 생의 서정적 묘사


이 시는 끝없는 평행선으로 이어진 기차의 레일처럼 각각의 가닥으로 감상해 볼 수도 있는 작품이야. 우선은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는, 단지 7,80년대의 시골 간이역의 쓸쓸한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묘사한 모습으로 읽어볼 수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사평역’이라는 곳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역임에 주목하여 각각의 시어들이 꿈(희망)과 관련한 인생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거든. 이 때 ‘사평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 공간에 대응되고 그 속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는 ‘막차’는 꿈을 상징하게 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고도’처럼 말이야.

하지만 시 ‘사평역에서’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두 레일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형태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매우 섬세하게 교차해가면서 한쪽 레일이 다른 레일을 생각나게 하고 다시 시의 중심 이미지가 다른 쪽으로 옮겨간 후 곧 이쪽을 넘보는 식의, 융합과 평행, 교차의 과정에 있어. 그러므로 그것을 하나씩을 떼 내어 순차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시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긴 하겠지만 그건 이 시가 가진 아름다움을 자칫 깎아 내릴 수 있으므로 이 시만큼은 묘사와 상징, 사실과 정서를 시적 화자가 이끄는 순서대로, 넘나들면서 감상했으면 해. 사설이 길었지? 우선 평소처럼 시 전문을 각자 소리 내어 읽어보자.[3분쯤의 시간이 흐른 뒤]

자, 소리 내어 읽었으면 다같이 눈 내리는, 아름답지만 어쩐지 쓸쓸하고 허한, 사평역의 풍경과 서정 속으로 들어가 볼까나?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평역 대합실 안의 사람들은 지금 막차를 기다리고 있어. 이들의 행선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들은 ‘한 두릅의 굴비’와 ‘한 광주리의 사과’를 들고 ‘귀향(歸鄕)’하고 있어. 다들 명절 선물이 됨직한 것을 손에 든 모습과 겨울이라는 계절을 감안한다면 때가 ‘구정’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왜 구정 때 막차를 기다리게 되었을까? 왜 그랬겠니? 그래,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인 거지. 이들은 고향으로 떠나는 당일까지도 밤늦도록 돈을 벌고 이제사 막차를 타기 위해 사평역에 온 것이야. 그래서 막차가 올 즈음의 사평역은 삶의 맨 바닥에서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간직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된 거야. 이렇게 지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막차는, 그러나 ‘좀처럼’ 오지 않았어.  ‘좀처럼’이란 부사어 속에 숨겨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보이니? 봐야 해. 볼 줄 알아야 해. 시어 하나는 그만큼 엄격하게 골라지는 것이고 의미로운 거야. 원래 기차라는 것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오는 거야. 한데 그런 기차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올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거지. 기차를 오지 않는 이유를 시 내부에서 찾으면 ‘밤새’ 내린 ‘송이 눈’이야. 물론 굳이 눈이 아니더라도 7,80년 즈음 시골 간이역은 완행열차가 제 시간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여하간 이 시 속에서 막차는 ‘눈’ 때문에 ‘좀처럼’ 오지 않고 있어. ‘좀처럼’이란 부사어와 호응하려면 ‘오지 않는다’든지 ‘오지 않고 있다’여야 하는데 일부러 완료형인 ‘오지 않았다’를 사용했다는 것도 눈여겨 봐두고 넘어가야겠지.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사평역은 고향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곳이야. 고된 삶에서 희망과 위로를 의미하는 고향, 그곳으로 데려다줄 막차를 기다리는 곳. 한편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사평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 공간 자체이기도 해. 한데 지금 기다리는 막차는 오지 않고 주위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이미 밤새 내려 쌓였는데도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싸륵싸륵’ 차가운 소리를 내면서 내리고 있어. 이렇게 눈이 끝없이 굵어지고 쌓이다간 막차 자체가 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 을씨년스럽고 심란한 상황 속에서 지금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다. 난로는 이제 막 타기 시작하였으므로 아직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과 몸을 녹이기엔 부족하기 짝이 없지. 이 난로는 막차가 시간 내에 오지 않음을 확인하고서야 지펴진 것이겠지. 이렇게, 사평역의 가난하고 추운 사람들은 우선은 그것을 위로삼고 안심할 수밖에 없는 거야. 기다림의 대상이 ‘막차’라면 ‘톱밥난로’는 그것이 오지 않는 동안 잠시 동안 위로를 주는 존재이며, 꿈이 아니라 꿈의 대체물, 최선이 아닌 차선적인 것을 표상해. 인생이란 종종 이렇게 정작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매우 더디게 오지. 그래서 사람들은 늘 차선적인 생을 살고 있는 거구.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믐처럼 존다. 이건 무슨 말일까? 말해 볼래? 무슨 뜻이겠니?

응,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삶에 매우 지친 사람들이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큰 곡선을 그리며 떨어뜨리는 모습. 맞다, 그럴 수 있겠다. 헌데, 하필 그믐달일까? 초승달과 그믐달 중에서 골랐다면 말이야. 그것도 그래, 아무래도 그믐달이 어울리겠지? 초생달이 바야흐로 생성 되는 달이라면 그믐달은 소멸하는 달이잖아. 설 전날 밤까지 생계를 위해 모든 힘을 다 써버리고 지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믐달이라.....야, 이건 백석의 ‘불경처럼 서러워졌다’처럼 기막힌 구석이 있는 걸.

몇은 졸고 몇은 쿨룩거리고. 조는 것이 삶의 피곤함과 무기력을 드러낸다면 쿨룩거림은 그런 생이 가져다 준 고통과 병이지. 몇이 졸고 몇이 쿨럭인다 했지만 시를 들여다보면 조는 사람 몇과 쿨럭거리는 사람 몇, 그리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는 화자 ‘나’가 전부야. 그러므로 현재 사평역의 사람들은 ‘조는 자’와 ‘아픈 자’ ‘옛날을 그리워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지.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반쯤이 졸고 절반쯤은 기침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것이야. 등장인물 전체가 아프거나 무기력하게 지쳐있는 모습이야.


그리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그리웠던 순간들’이 언제인지 시 속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그건 ‘그리워할 만한’ 순간일 거구, 과거 시제인 걸로 봐서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의 순간이지. 그리워할 만한 과거의 순간이라......지금보다는 따뜻했고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자 다시 쉬 되찾을 수는 없는 시간이겠지. 과거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꿈꾸기 마련이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그리웠던 순간들’로 보편화시키자면 그건 ‘유년 시절’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되돌아갈 수 없는, 가장 감미롭고도 가장 황홀했던 시절. 세상이 무서우면 ‘엄마’의 치마폭으로 쏘옥 들어가 버릴 수 있었던 때. 자궁처럼 안전하고 편안해, 인생이란 것이 전혀 버겁지도 두렵지도 않았던 시절. 생이 이렇게 어째볼 수도 없이 갑갑하고 딱딱하고 힘겨운 게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유동적인 것이었던.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사람들은 과거를 뒤지는 법이야. 아무리 생각해봤자 앞으로도 비빌 언덕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미래를 희망하는 대신에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처럼 왕년을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수밖에 없지. ‘그리웠던 순간들’은 지금 관찰되는 사람들처럼 시의 화자 역시 매우 고단하고 가망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줘.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이들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끼는 거야. 그들의 표정에서, 과거를 뒤져 현재를 추스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고 동정과 공감, 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야.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아는 처지가 아니므로 이불을 덮어주거나 옷을 벗어서 덮어줄 수는 없지. 톱밥을 던져주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화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정(인간애) 표현이야. 그러면서도 톱밥은 한 줌밖에 던질 수 없지. 왜냐면 막차가 얼마나 더 늦어질지도 모르고 여차하면 그것은 오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다들 그것을 각오해 둔 양 이 시 속에서 막차를 애타게 기다리는 인물은 없어. 이상하게도 그들은 움직임이 없어. 매우 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어. 움직임이라곤 기껏해야 조는 것과 기침을 하는 것뿐 마치 그 자리에서 영원히 막차를 기다려왔고 그럴 것처럼 그냥 있어. 고향에 가려고 막차를 기다리고는 있지만 속으론 고향 가는 것이 행복하기는커녕 두려운 사람들처럼...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면 깊숙이 있는 이 ‘할 말들’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할 말들이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왜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그 ‘말’의 내용은 ‘그리웠던 순간’처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지는 시의 내용과 시어의 성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말하자면, 그들에게 ‘귀향’은 그렇게 좋기만 한 게 아닌 거야. 그게 침묵의 이유야. 고향은 이제껏 생을 할퀴어 온 세월 속에서 미치도록 그리웠던 곳이었지만 막상 그곳으로 쏜살같이 달리는 막차를 난 뒤의 묘사를 보면 결코 행복하고 좋은 곳만은 아니었던 거야. 하여 이들은 다만 시렵고 힘없는 ‘청색’의 손을 아직은 온기가 부족한 톱밥난로의 불빛에 던져 둔 채 졸거나 기침을 할 뿐이야. 여기에서 차가움의 청(靑)과 따뜻함의 적(赤), 이러한 색채와 냉온의 대조도 눈여겨   보고 넘어가자. 시인은 의도적으로 청색의 차가움을 붉은빛으로 감싸고 있어. 차가움을 차가움만으로 던져 놓치는 않는 것, 이는 곽재구 시인의 특징이야. 가난하고 힘겹고 쓸쓸한 삶을 소재로 노래를 하면서도 늘 그것을 서정적이고도 따뜻한 시선 - 사랑 - 안에 포근히 감싸는 것.       


산다는 것이 때로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이 시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이 부분이야. 지금까지 사평역 내부 풍경과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고달픈 모습들을 주로 보여줬다면 여기서 비로소 그들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어. 여기에서 이 시는 한쪽 레일을 버리고 다른 쪽 레일로 옮겨온 거야. 그럼으로써 분명하게 말하지. ‘산다는 것’ = 인생. 이 시의 풍경은 곧 생에 관한 우회적 진술이자 서정이라는 것을. 복잡한 이 문장을 단순화시켜보면, '모두들 산다는 것이 침묵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라는 주절(主節)과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라는 수식절(修飾節) 나누어볼 수가 있어. 수식절(修飾節)은 주절(主節)의 ’침묵해야 한다‘를 꾸며주고 있지. 눈여겨 볼 것은 이 두 개의 문장이 서로 다른 시간들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이야. 다시 말해, ’모두들 산다는 것이 침묵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 이들의 조용하고 무력한 모습이라면, 또 하나의 문장은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과거이면서 현재인 척 하는 거지. 이들이 늦은 밤까지 고된 일을 하였고 게다가 술도 한 잔 걸쳤고 그리고 과일 가게나 생선전 앞에서 한 두릅의 굴비와 한 상자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다‘ 이곳에 왔음을 말해주는 거야. 특히 ’만지작거리며‘는 망설임을 내포하고 있어. 다시 말해 이들의 ’귀향‘이 단순한 기쁨과 설렘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거야. ’술에 취한 듯‘도 ‘침묵’도 이들의 귀향이 썩 개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지. 게다가 ’‘귀향하는 기분’이라니. 이는 누군가는 아직도 귀향을 망설이고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슬쩍, 감춘 듯 드러내고 있지. 술에 취한 듯. 아, 뚜렷한 현실 인식은 너무 잔인해. 술을 빌리지 않으면 잘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을 것 같았던, 도시에서 보낸 바닥의 나날들. 귀향하는 기분으로 살아냈겠지. 술에 취한 듯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고는 견뎌내기 힘든 생이었겠지. 그들은 지금도 고향에 편안히 쉬러 가는 처지가 아니야. 기대러 가는 것도 아니지. 가서는 아마도 가장 부지런히 집안의 밀린 일들을 할 것이고 젤 멀쩡하게 사는 척 하며 있는 것 없는 것 다 나눠주고 돌아오겠지. 가장으로서. 집안의 버팀목으로서.


오래 앓는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험악한 세월, 병원은커녕 자신을 위해서는 감기약 한 번 못 지어먹고 쓴 약 같은 담배만 는 사람들. 막차는 오지 않고 아직까지도 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그런데 이 묘사를 봐. 가장 절망적이어야 할 상황에서 등장하는 이 아름다운 묘사를. ‘싸륵싸륵 눈꽃이 쌓이고’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시인은 고통과 시련의 표상인 눈을 왜 이렇게 서정적이고 따뜻하게 묘사하였을까.

자칫하면 눈 때문에 다들 고향도 못갈 판인데. 이게 특징이라니까. 곽재구 시인의 시적 개성.

황폐하고 절망적인 무덤을 묘사하면서도 그 위에 핀 들꽃의 기막힌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시선. 톱밥난로가 어느 정도 따뜻해졌어. 그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고 위로를 받는 순간은 차라리 ‘지금’이야. 가장 행복한 순간은 고향에 닿는 때가 아니라 그 고향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인 거야. 이 시에서 가장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지.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자정 넘으면’은 기차를 탄 뒤의 시간이야. 사람들과 헤어진 이후의 시간, 차창 밖으로는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낯설음, 뼈아픔, 그게 다 설원이라는 인식. 낯설음(소외)과 뼈아픔(고통)이 설원이라는 생각은 곧, 삶이란 이렇게 막차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것이라는 인식에 닿아 있어. 설원은 낯설고 뼈아픈 삶의 현실을 상징하고 그렇다면 막차는 화자의 생이 되는 거지. 그렇다면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은 뭘 의미할까? 한 번이라도 겨울밤에 열차를 타본 사람은 알지. 겨울밤 열차의 차창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차창은 우선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비추어주지. 또 하나 새하얀 설원을. 그것 외에는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깊이 잠겨 있어. 차창은 그러므로 차가운 현실(설원)과 자신의 생을 바라보는 불안하고 아슬한 눈이자 인식이야. 막차는 지금 언제 찬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가을날의 단풍잎처럼, 불안한 차창(인식)을 달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어. 물론 화자의 고향으로 달려가겠지.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화자의 어조는 들뜨기는커녕 담담하기만 하다. 심지어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곧 가게 될 고향보다는 다시 한 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한다. 눈물 - 그리움, 동정, 공감, 아픔, 사랑 -을 아직도 졸거나 기침을 하며 톱밥난로가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던져주면서......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인은 ‘눈물’ 곁에 ‘불빛’이라는 시어를 잊지 않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기억해 두자. 고단한 인생과 힘겨운 현실을 적으면서도 그의 시가 아름답고 따뜻하게 수용되는 건 바로 이러한 그의 시선 때문임을. 그는 인생이 지독하게 각박하고 험난하단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인생을 깊게 사랑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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