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과 창조의 철학자 들뢰즈(2)-김재인
이제 본격적으로 "다양성"(multiplicite, 多, 여럿)에 대해 살펴보자.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지속과 공간의 복합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합물의 올바른 쪽, 좋은 쪽"과 결합되어 있는 지속을 분해해 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복합물의 분해가 우리에게 두 유형의 '다양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베르그송주의}, 30쪽). 공간에 의해 표상되는 그 하나는 "외부성의, 동시성의, 병치의, 질서의, 양적 분화의, 정도상의 차이 의 다양성이며, 불연속적이고 현실적인 , 수적 다양성"인 반면, 순수 지속 속에서 나타나는 다른 하나는 "내적인, 연속의, 융합의, 유기체/조직의, 다질성의, 질적 분별의 또는 본성상의 차이 의 다양성이며, 수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성"이다(30-31쪽). 반성을 거치지 않은 일상인들 뿐 아니라 물리학자나 심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에게도 이 두 유형의 다양성은 구별되지 않고 있기에 이런 구분은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 베르그송에게 중요한 것은 <다양/여럿>과 <단일/하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두 유형의 다양성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31쪽). 우선 베르그송이 {의식의 직접 자료에 관한 시론}(1889)에서 다루는 數의 예를 보자. 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통상적으로 '단위들의 집합' 또는 '一과 多의 종합'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단위들은 서로 동일한(identique) 것이다' 또는 '적어도 사람들이 그것들을 세는 이상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덧붙여야 보다 충분한 정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수를 셀 때는 세어지지 않는 개별적 차이는 부정된다. 羊이 50마리가 있다 할 때 그 각각의 羊의 개별성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수가 단위(불어로 는 '단위'와 '단일성/통일'로 번역된다. 본래 그것은 불어의 부정관사 un/une의 명사화로서, '하나임'을 뜻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독어로는 Einheit.)들의 집합이며, 수를 구성하는 여러 단위들의 종합인 만큼 단일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고 했을 때, 수 및 산술의 단위 그 자체는, '본성상 변화함이 없이도 나누어지는 것'의 모델이다. 이것은 "수는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 또는 수의 차이는 실현되었건 아니건 항상 그 자체로 현실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34-35쪽)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것을 양적 다양성, 대상 또는 객관적인 것이라 부른다. 그러면 질적 다양성, 주체 또는 주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성상의 변화 없이 나누어지는 일이 없으며, 나누어질 때는 본성상의 변화를 하는' 것을 뜻한다. 지속은 非수적인 다양성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여럿'(plusieur)이 없이도 '다른 것'(autre)이 존재한다. 즉 "주관적인 것 또는 지속은 잠재적 (virtuel)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현실화되는(s'actualiser) 한에서 잠재적인 것이며, 현실화되면서 그 현실화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화는 분화를 통해, 갈라지는 계열(ligne)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또한 그 고유한 운동에 의해 그만큼의 본성상의 차이를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36쪽) 이러한 질적 다양성의 대표적인 예가 심적 감정 상태이다. 심적 감정 상태의 경우에 분별되는 단위로 구별될 수 없는 상태들의 상호 침투가 존재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종소리 또는 음악을 듣는 경우를 예로 든다. 그때 우리는 뒤섞인 다양한 감각들, 질적인 인상들에 마주하게 된다. 그것들은 연속적일(successive) 때조차도 서로 침투한다. 이것이 지속의 경험이며, '항상 동일하면서 항상 변하는' 존재가 하는 경험이다. 우리는 운동이라는 개념을 동일한 분석에 맡길 수 있다. 제논의 역설 중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경주 얘기는 유명하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앞에 있는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거북은 조금이라도 앞으로 전진해 있을 것이고, 아킬레우스는 다시 거북이 도달해 있는 지점까지 가야 하고, 이런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에 맞서 우리는 "운동체에 의해 주파된 공간"과 "순수 운동"(즉 지속)을 구분해 내야 한다. 전자는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수적 다양성을 형성하며, 실제적이건 가능적이건 그 다양성의 모든 부분은 현실적이며 다만 정도상의 차이가 날 뿐"(42쪽)이다. 한편 후자는 " 변질 이며, 잠재적이고 질적인 다양성이며, 발걸음으로 나누어지는 아킬레우스의 경주로와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누어질 때마다 본성상의 변화를 한다"(42쪽). 베르그송은 위치 이동이 있을 때는 언제나 "다른 본성을 가진 이동"(43쪽)이 있다는 것을 밝혀 낸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경주로를 구성하는 수적 부분들로 보인 것은, 안에서 체험하기에는 단지 회피된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43쪽) 이런 서술은 베르그송이 발견해 낸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 '잠재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잠재성이라는 개념을 최고의 지점에까지 이르게 하며, 기억과 생명에 대한 모든 철학을 그 위에 세우는 저자"(37쪽)인 것이다. 잠재성(virtuel)이란 개념은 우선 가능성(possible)이란 개념과 분명히 구분된다. 가능성은 실재(reel)와 반대되는 것으로 실재를 가지고 재구성해 낸 것이다. 가능성에 대한 비판은 앞서 예시한 '무'에 대한 비판과 같은 방식을 따른다. "가능성의 관념에는 실재의 관념 안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왜냐하면 가능성은 실재에다가 '일단 실재가 생산되었을 때 과거로 그것의 이미지를 되던지는 정신의 행위'와 이 행위의 동기를 덧붙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6-7쪽) 그렇기에 흔히 실재는 가능성을 닮았으며 가능성이 '실현'(realiser)된 것이라고 상정되지만, 사실 "가능성을 닮은 것은 실재가 아니며, 실재를 닮은 것이 바로 가능성이다"(101쪽). 모든 것은 실재한다. 다르게 말하면, 실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가능성은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거나 하며, 가능성들 중 실현된 것들만이 실재라고 얘기되지만, 이는 전혀 진실이 아니다. 가능성은 거짓 문제의 근원이며, 폐기되어야 한다. '실현'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잠재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적(actuel)이지 않으면서 실재적인"(99쪽) 것이다. 그것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된다. 그리고 현실화의 규칙은 차이, 갈라짐 그리고 창조이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현실성은 그것이 구체화시키는 잠재성과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100쪽). 이렇게 얘기하면 이미 우리말로는 그게 그거인 것 같아서 헛갈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말 어감을 잠시 괄호 치고 원어의 어감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네 가지 대립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virtuel과 possible의 대립, possible과 reel의 대립, reel과 actuel의 대립, actuel과 virtuel의 대립. 우선 virtuel과 possible은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지만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possible은 거짓 문제의 근원인 반면 virtuel은 세계의 실재를 드러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대립은 폐기되어야 한다. possible 중 어떤 것들이 reel이 되는('실현'은 'reel이 된다'는 단순한 의미이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대립은 거짓 대립에 불과하다. 한편 reel과 actuel은 대립된다기보다는 오히려 virtuel과 possible의 관계처럼 혼동되어 쓰인 개념이다. 하지만 그 둘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actuel은 reel의 일부에 해당할 뿐이며, reel은 actuel 더하기 virtuel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actuel과 virtuel의 대립이 남는다. 이 둘은 엄밀히 말하면 대립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은 '현실화'의 관계에 있다. 현실화란 virtuel이 actuel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합하자면: 세계는 reel인데, 그 reel은 actuel과 virtuel의 합이다. 이제 우리가 좀 더 해명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현실(성/적)'과 '잠재(성/적)'라는 말로 번역한 이 둘의 관계이다. 철학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내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떤 주제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유명한 dynamis. 베르그송이 고대 그리스 철학에 정통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의 학위 논문 심사에서 부논문으로 제출된 주제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다만 dynamis에 관련해서 몇 가지 지적을 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 말은 서양어권에서 potentiality, virtualite, puissance, Macht 따위의 말로 번역되어 왔으며 동양에서는 潛勢態, 潛在態, 可能態 따위의 말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dynamis는 현실태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하다. "현실태란 어떤 순간에 어떤 실체가 있는 상태나 또는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잠세태란 그 실체가 장차 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잠세태 역시 자연의 실재적인 특색이라 하겠다."(렘프레히트가 쓴 {서양철학사}, 국역본 117쪽에서 인용) 도토리는 참나무로 생장할 수도 있고 땅 속에서 썩어 버릴 수도 있으며 어떤 동물에게 먹혀 영양분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현실태인 도토리의 '다양한' dynamis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자면 참나무 역시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dynamis와 현실태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잠재태'와 '현실태'는 세계/실재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이다. 어떤 현실태는 그것의 잠재태들 중의 하나로 현실화하며, 그 현실화된 것은 이미 다시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태가 이미 잠재태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실화될 수 없다. 현실화되는 것은 어떤 현실태의 현실태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어떤 현실태의 잠재태로서의 존재이다. 하지만 어떤 현실태의 잠재태로서의 존재는 그것이 현실화된 후에는 이미 잠재태로서의 존재일 수 없고 어떤 다른 현실태 및 그 다른 현실태의 잠재태로서의 존재가 되어 있다. 현실화는 질적 변화이다. 어떤 것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미리 결정될 수 없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完成態(entelecheia, 어떤 것이 telos에 도달된 상태)를 언급함으로써 앞의 발견을 다시 후퇴시키는 지점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완성태란 결국 種을 의미하는데, 그는 종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완성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도토리는 참나무가 되어야 하고 아이는 成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 베르그송은 진화론의 주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제를 종합하는 과제를 떠맡았던 것이다.) 다만 베르그송, 그리고 들뢰즈의 사유의 깊은 뿌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흐르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 다른 예를 들면: 들뢰즈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질료(hyle)와 형상(eidos)의 '역동적 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무로 된 책상에서 책상은 형상이고 나무는 질료지만, 원목에 대해서 나무는 형상이고 섬유질은 질료이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형상인 섬유질과 질료인 세포, 형상인 세포와 질료인 탄소와 질소의 화합물 등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무한히 나아가 궁극적 질료를 묻는 데까지 가지는 않는다). 질료 일반이란 없다. 질료란 무정형성이며, 책상이라는 형상은 그 무정형인 질료에 모양을 부여하는 '힘'이다. 질료는 형상과 동시에 탄생한다. 책상은 항상 어떤 것(나무, 쇠, 돌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책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나무, 쇠, 돌 등은 그 자체로는 다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상이다. 이름들은 항상 형상의 이름인 것이다. 들뢰즈는 질료와 형상의 역동적 관계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계'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모든 은유와는 관계없이 참으로 기계들인 것은 어떤 점에서인가?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 로 정의된다. 현실로부터의 분리로 생각된 절단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절단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서 달라지는 여러 차원에서 행해진다. 모든 기계는 무엇보다도 연속하는 물질의 흐름(휠레hyle)과 관계하며 이 물질을 자른다. . . . 휠레는 사실 한 물질이 관념적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성을 나타낸다. . . . 절단은 연속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의 조건이 되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으로서 포함하고 있거나 규정하고 있다."(국역본 61쪽) 이제 우리는 '잠재(성/적)'와 '현실(성/적)'의 구분이 스피노자의 '能産的 自然'(natura naturans)과 '所産的 自然'(natura naturata)의 구분과 동일한 사유에서 나온 구분임을 지적해야 하겠다. 스피노자에게서 유일한 실체인 신(Deus)은 곧 자연이다. 그 자연에는 두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생산하는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생산된 측면이다. 이렇게 자연의 '하나임'을 얘기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신을 얘기하는 순간에도 자연을 초월한 세계(meta-physica)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생산은, 들뢰즈의 말처럼 생산, 분배, 소비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생산은, 자연 안에서 일어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산적 자연'이 다시 '능산적 자연'이 될 수 있으며, '현실'이 '잠재'가 될 수 있는가? 이미 무언가가 되어 버린 것이 어떻게 다시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는가? 우선 베르그송의 답을 들어보자.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지속>은 본질적으로 잠재적 다양성( 본성상의 차이가 나는 것 )을 정의한다. 그 다음에 <기억>은 이 다양성, 이 잠재성 안에서의 모든 차이의 정도들 의 공존인 것처럼 보인다. 끝으로 <생명의 도약>은 그 정도들과 상응하는 분화의 계열들 에 따라서 - <생명의 도약>이 자기 의식을 얻는 인간이라는 이 정확한 계열에 이르기까지의 - 이 잠재성의 현실화를 가리킨다."(119쪽) 우리는 '기억'과 '생명의 도약'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것들은 결국 '지속'의 어떤 상태에 대한 표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은 다양성의 두 유형 중 한 쪽인 잠재적 다양성인데, 기억은 그 잠재적 다양성 안에서 모든 차이들의 정도가 공존하는 것을 가리키며, 생명의 도약이란 그 각각의 차이의 정도들에 따라 잠재성이 현실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베르그송은 진화를 '적자 생존'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생명이 물질이라는 조건과 장애를 넘어가는 과정을 진화라고 본다. 여기서 '생명'과 '물질'은 각각 지속의 어떤 양상을 가리키는데, 베르그송은 그것을 '이완/팽창된 지속'과 '수축/응축된 지속'이라는 말로 구분한다(106쪽 그림 참조). 베르그송이 진화에 대해 '생명의 도약'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 말이 진화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잠재성의 현실화는 사실 어떤 신비를 포함한다. 진정한 새로움이, 없었던 것의 창조가, 생성이 그 '순간' 일어나기 때문이다. 種(eidos)의 변화가! 베르그송이 이 사태에 대해 '생명의 도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니, 얼마나 멋진가. 우리는 여기서 니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존재론과 만나게 된다. 세계를 이루어진 것의 총체로 보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바깥에' 있지는 않지만 이 세계와는 '다른' 곳으로 이행해 가는 의지. 게다가, 니체는 이것을 '권력 의지'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앞에서 잠재성이라 번역한 dynamis라는 말이 puissance, Macht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단지 언어학적 유사성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가 요구하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지도에서 이런 만남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아하, 이런 만남을 생성시키는 일 자체가 얼마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일인가! 3. 글을 맺으며 우리는 다소 거칠게 들뢰즈의 초기 저서 중 하나인 {베르그송주의}에 소개된 개념들을 축으로 놓고 들뢰즈의 철학을 전반적으로 살펴 보았다. '기억'이나 '시간'의 문제는 살펴보지 못했지만, 잠재성이란 중요한 개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서술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니체의 '권력 의지'나 들뢰즈의 '욕망'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는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잠재성' 개념을 이해한 후에 '권력 의지' 개념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을 이해하고 하는, 이런 식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욕망'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니다. 이해는 단번에 행해진다. 어차피 '욕망' 개념을 알려면 {안티 오이디푸스}를 직접 읽는 게 제일 좋다. 개론적인 글은 저술들 각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것들 사이의 공간에 대해 서술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만, 그 역할도 사소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베르그송주의}를 자세히 읽으려 하다 보니 들뢰즈를 소개함에 있어 많은 미진함이 있게 된 것 같다.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요 개념들, '욕망하는 기계'니 '기관들 없는 신체' 같은 개념들을 직접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니체와 철학} 및 {니체}는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하더라도.) 하지만 '잠재(성/적)'와 '현실(성/적)'의 구별에서, 그리고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구별에서,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들 없는 신체'의 구별에 대응하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이 문제를 다른 곳에서 다루고자 하거니와, 독자들도 생산적 독서를 통해 이 물음을 같이 풀어 보면 어떨까. 들뢰즈의 책은 누룽지 같아서 처음에는 딱딱하지만 오래 씹을수록 맛이 깊어진다. 독자들 역시 강한 이빨로 직접 씹어 가며 맛을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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