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노마드-지식인의 미학

체 게바라 2006. 10. 6. 15:18

 

노마드-지식인의 미학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므로 추악함이 생긴다
사람들이 선함을 선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음이 생긴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기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고
길음과 짧음이 서로 형성되며
높음과 낮음이 서로 대비되며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

지식인은 하지 않음의 일에 거처를 정하고
말하지 않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스스로 자라게 하여 간섭하지 않고
생성하여도 소유하지 않고
이룩하여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무르지 않는다
오직 머무르지 않으니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노마드적 생성의 길을 탐구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참(眞, truth)이고, 다른 하나는 선(善, good)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름다움(美, beauty)이다. 참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의미하고, 선은 현실적으로 정당한 것을 의미하지만, 아름다움은 미래의 생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은 과거에 끊임없이 존재하였던 노마드적 생성의 길이고, 선은 과거의 생성적 선분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만들어진 원칙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과거에 끊임없이 존재하였던 길도 아니고, 그것에 따른 현실적인 원칙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미래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진과 선은 과거의 지속이라는 동일성을 추구하지만, 미는 현재적 단절을 통한 미래의 차이를 추구한다. 노마드적 생성의 길에 대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성하는 이 세 가지는 항상 상호보완적이다.

 

문제는 국가철학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한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예술가를 추방해야만 한다고 말한 것처럼, 국가철학은 아름다움을 배제하고 참이라는 과거의 생성적 선분의 길을 토대로 현실적으로 타당한 선의 원칙이라는 법률을 세운다. 따라서 국가철학은 진·선·미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상호 구분한다. 국가철학적 구분에 의하면 진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이고, 현실적인 선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미래적 생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다. 따라서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고자 하는 국가철학은 종교와 결합하기도 하고, 또는 과학과 결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국가철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과 결합할 수 없다. 국가철학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플라톤처럼 예술가를 추방하려고 하거나, 중세의 종교처럼 초월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하기도 하고, 근대의 과학처럼 현실적 타당성을 토대로 예술을 분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대의 국가철학, 중세의 종교와 결합한 국가철학, 그리고 근대의 과학과 결합한 국가철학이 아무리 예술을 박해하고 억압하려고 해도 예술은 항상 근원적으로 노마돌로지이다.

 

노마돌로지의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진과 선을 토대로 하는 아름다움조차도 세상을 사유하는 인식적 틀이 어느 하나의 길로 규정된 것이고,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틀지워진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시간적으로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신라시대의 아름다움, 조선시대의 아름다움, 그리고 오늘날의 아름다움이 다르듯이, 서양의 아름다움과 아프리카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차별성을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의 구별없이 아름다움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구별하여 하나의 아름다움과 대립되는 모든 아름다움을 추악함으로 규정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구별은 통치를 위한 수단이고, 현존하는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국가철학의 인식론적 포획장치이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안된다. 길이나 이름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또한 아름다움으로 규정되면 이미 아름다움이 아니다. 따라서 길이나 이름이 이미 길이나 이름으로 규정된 것을 벗어나면 무한한 길이나 이름이 생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또한 이미 규정된 아름다움으로부터 벗어나면 무한한 아름다움이 생성된다. 아주 미묘하게도 현실적으로 구성된 아름다움이 생성되는 원칙과 새로운 미래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생성되는 원칙은 동일하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므로 추악함이 생긴다/ 사람들이 선함을 선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음이 생긴다"처럼 "아름다움"과 "추악함", 그리고 "선함"과 "선하지 않음"이라는 두 개의 관계는 대립적 관계인 동시에 상대적 관계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 혹은 "선함을 선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아름다움과 하나의 선함을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모든 것을 추악함이나 선하지 않음으로 규정하는 대립적 관계를 낳는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장치의 "마법사-왕의 머리"를 따르거나 "법률가-사제의 머리"를 따르기 때문에 항상 "아름다움"과 동시에 "선함"이라는 "유일자(the one)"라는 형이상학의 원칙을 따른다. 중세의 유럽은 신/인간, 그리고 서구적 근대는 정신/몸이라는 대립적 관계를 통하여 신과 정신을 "아름다움"과 "선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유일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름다움"과 동시에 "선하지 않음", 혹은 "선함"과 동시에 "추악함"이라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립적 관계는 단순한 두 개의 대립이 아니라 항상 이중 분절이라는 표현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세적 표현은 '신(교회)'인 동시에 '왕'이고, 그것의 근대적 표현은 '정신(절대자, 혹은 이데아)'인 동시에 '국가'이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선함"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또 다른 관계에 의하여 규정될 수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자"가 필요로 하는 동일성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대립적 관계란 "마법사(사제)와 신도", 혹은 "왕(법률가)과 신민"의 관계에서 받아들여지는 원칙이지 그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마드들의 원칙은 아니다.

 

노마드들이 바라보는 생성의 원칙은 이중분절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상대적 관계의 생성으로 이루어진 유물론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찾아질 수 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기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고/ 길음과 짧음이 서로 형성되며/ 높음 낮음이 서로 대비되며/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처럼 "있음과 없음"이나 "어려움과 쉬움"이라는 추상기계도 "길음과 짧음", "높음과 낮음", "음(sign)과 소리(sound)", 그리고 "앞과 뒤"와 같은 물질기계처럼 유물론적인 상대적 생성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외재적 특성이지, 기계 자체의 내재적 특성이 아니다. 따라서 어떠한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 관계에서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길음과 짧음", "높음과 낮음", "음과 소리", 그리고 "앞과 뒤"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어떠한 관계에서 구성되는가"나 "선함은 어떠한 관계에서 구성되는가"를 질문해야지 "아름다움이나 선함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안된다. 길이나 이름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나 선함도 그 무엇으로 규정되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유일자라는 "1"이라는 숫자의 절대성으로 빠지거나 그 무엇과 그 무엇이 아님이라는 "2"라는 숫자의 대립적 관계로 빠지게 된다. 1과 2라는 숫자의 절대성이나 동질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3"이라는 숫자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3"이라는 숫자는 1과 2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라 1과 2라는 숫자가 지니고 있는 절대성이나 그 무엇이라는 동질성으로부터 벗어나 그 어느 하나가 아닌 수많은 다수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3의 숫자를 사유하는 사람이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이다. 즉, 마법사(신)와 왕이라는 유일자라는 1의 숫자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나 왕이라는 유일자와 그에 대비되는 나(신도나 신하)라는 2의 숫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1이나 2의 숫자에서 벗어나 다수의 생성을 예비하는 3이라는 숫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3의 숫자를 대표하는 사람이 예술가와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이고,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성인(聖人)이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고대의 성인은 현인(賢人)과 다르다. 현인은 조직이나 집단 속에서 1이라는 숫자에 속하는 왕이나 신을 대신하여 다스림을 행하는 사람이거나 2라는 숫자에 속하는 신하나 국민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성인은 "말하는 사람(聲人, 예술가)"이거나 "노마돌로지의 사유에 대하여 더할 수 없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인은 1이나 2의 숫자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인데 반하여, 성인은 1이나 2의 숫자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역사관으로 세계를 이해한 것은 근대 이전의 세계를 마법사나 왕이라는 1의 세계로 단순화시켜, 근대를 주인과 노예라는 2의 숫자로 바라본 근거가 된다. 그러나 중국 근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루쉰은 역사란 주인과 노예의 역사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 사이에 광인(狂人)이 존재하는, 즉 "주인-광인-노예"라는 3의 숫자에서 "역사란 바로 광인의 역사"로 인식한다. 루쉰이 이야기하는 광인은 니체나 푸코가 현실적 원칙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그 "초인"이거나 "광인"이다. 왕이나 마법사를 따르지도 않고 대중이나 민중을 다스리려고 하지도 않는 단순히 "말하는 사람"이거나 "노마돌로지의 사유에 더할 수 없이 뛰어난 사람"은 1이나 2의 숫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바라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인은 하지 않음의 일에 거처를 정하고/ 말하지 않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마법사와 왕은 이 세상을 지배와 통제의 행위로 바라보고, 그를 따르는 현인은 이 세상을 다스림의 행위로 바라보지만, 그리고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신하나 국민은 지배와 통제, 그리고 다스림에 따르는 복종과 종속의 행위로 세계를 바라보지만, 지식인은 그러한 지배와 복종, 혹은 통제와 종속의 행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없는 "하지 않음"의 일에 삶의 거처를 정한다. 이러한 "하지 않음의 일"은 이미 만들어진 길이나 이미 인식하고 있는 이름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욕망 있음"이나 "이름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욕망 없음"이나 "이름 없음"의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욕망 없음"과 "이름 없음"은 "길을 길이고 부르면 이미 길이 아니고, 이름을 이름으로 부르면 이미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1과 2라는 숫자에 의하여 정하여진 것 이외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므로 "말하지 않음의 가르침을 행"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음"이 가르침이 되는 이유는 "만물이 스스로 자라게 하"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만물이 스스로 자라게 하"는 미래를 사유한다는 것은 현재의 관계에 의하여 과거가 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의하여 과거와 현재는 항상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1과 2의 숫자에 의하여 규정되는 과거와 현재에서 벗어나 3이라는 이질적 언어들이 생성되는 미래를 항상 또 다른 미래로 연기시키는 것이 자식인의 역할이다. 따라서 "만물이 스스로 자라게 하여"도 지식인은 그것에 "간섭하지 않고/ 생성하여도 소유하지 않고/ 이룩하여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무르지 않는다". "간섭하"거나 "소유하"는 것, 그리고 무엇을 "자랑하"거나 어떤 위치에 "머무르"는 행위는 미래의 또 다른 현재에 의하여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3이라는 숫자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실이기도 하며, 1과 2의 숫자가 암시하는 지배와 복종, 혹은 통제와 종속의 어느 한 쪽에 정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직 지식인만이 "오직 머무르지 않으니/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미래나, 혹은 "이름 없음"이나 "욕망 없음"의 "가물하고 또 가물한" 근원적 세계를 사유할 수 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지식인의 사유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영원회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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