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포스트모던을 넘어서는 위르겐 하버마스

체 게바라 2006. 7. 12. 14:59

 

 

 

위르겐 하버마스라는 이름을 내가 처음 접하게 된 것은 2003년 10월 민주화기념사업회에서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그간 귀국이 하락되지 않았던 해외 거주 민주 인사들에 포함되었고, 그가 귀국하자 법원은 즉각적으로 국가정보원에서 신청한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체포 영장에 대하여 승인함으로써 국정원과 검찰의 조사와 기소에 의해 결국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이라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로 촉발된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에게 '국가보안법'의 유령을 다시 한번 보여준 송두율 교수의 스승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작년 줄기세포논쟁으로 야기된 과학의 도구적 목적적 수단성이라는 '과학의 인간도구화'를 비판해온 하버마스는 '서구 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의 담보는 도구적 합리성과 도구적 이성'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현대 과학은 인간의 이성에서 가치합리적 측면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순수한 이성을,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위해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시킨 것'에 대해 가한 통렬한 비판때문이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碩學이다. 그는 비판이론을 계승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지막 인물 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은 계몽주의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그는 18세기의 근대를 연 계몽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계몽과 이성은 인간 해방의 유일한 가능성이 된다.

현대에 대한 다양한 진단이 우리의 시야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 다양한 진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에 대한 반란, 이성에 대한 불신, 절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에 대한 다양한 진단의 하나로만 우리들에게 인식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진단은 우리시대의 지층을 정확히 분석한 결과로서 우리들에게 강요된다. 마치 환자가 거부할 수 없는 의사의 '간암선고'와 같이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의사의 진단에 반항을 고하는 환자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우리 시대는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아님을 천명한다. 하버마스는 "이성은 죽지 않았다"고 지금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나긴 문명의 모험을 감내하며 획득한 인류의 자산이 '비판적 이성'과 '계몽정신'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을 쉽게 망각한 값 싼 헤프닝이 된다. 포스트모던은 유토피아를 상실한 고아의 세계인식일 뿐이다.

하버마스를 말하면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될 부분이 있다. 하버마스의 계몽은 시대를 이탈한 계몽이 아니라, 시대와 맞대면하는 계몽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부정적으로 탈색된 채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계몽주의자'와는 다르다. 그는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테러를 감행하는, 근대의 역사속에서 좌초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철저히 '현대와 현대성'에 집중한다. 또한 그는 현대에 대한 정신사적 지도를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업을 쉴 새 없이 감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느 누구보다 포스트모던을 올바로 직시한다. 더 나아가서 포스트모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항을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꿰뚫어본다. 거기에 그는 포스트모던의 다원성과 보편주의적 이념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는 보편주의적 이념과 가치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포스트모던의 다원성'과 '보편주의적 이념'의 결합을 자신의 '의사소통행위이론' 안에서 시도하려 한다. 그러므로 합리적 의사소통 안에서 다원성과 보편성은 서로 만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혼돈의 바다에 표류하는 서글픈 운명이 아닌 것이다. 하버마스는,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이념의 편린들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