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이들기 아까운 여자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피부는 되돌릴 수 있습니다."
화장품 광고의 문구다. 대부분의 화장품 광고의 카피는 시간에 싸움을 건다. 나의 생물학적 조건들이 어떤 시간의 정점에서 마모되고 부서지기 시작한다고 여기도록 만든다. 그래서 피부의 문제를 시간의 문제로 바꾸어 놓고 시간을 적으로 삼아 대결을 신청하는 것이다. 시간을 적으로 여기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재난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사실 최근의 성형 열풍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굳어진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 땅에서 남녀 모두 '늙어 보인다, 나이들어 보인다'는 말은 최대의 욕이고 '젊어 보인다'는 최대의 칭찬이다. 왜 우리는 나이들어 보인다는 말에 화가 나는 것인가? 그것은 젊음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늙어 보인다는 말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졌다는 판정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젊고 아름다운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소위 몸의 정치학이고 얼굴이라는 외양의 정치학이다. 통계 좋아하는 미국 어느 심리학자의 자료는 외모가 우월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평균 년봉이 20%정도 높고, 진급의 경우는 3배정도 빠르다는 결과는 아름답고 멋진 외관이 마켓팅, 개인의 능력을 넘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경쟁력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 몸은 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젊음과 육체적 아름다움을 상품화하는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풍토는 외면보다는 내면적 가치에 있다는 말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한 진부한 말의 동의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화장품, 성형 기술, 피트니스 센타 같은 도구들이 노화를 지연시켜줄 수 있게 된 현재의 상황도 나이 들어갈 미래를 지금 당장 지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어 보인다는 말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를 회복할 수 없는 결여이자 불완전으로 받아 들인다. 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인가?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에너지 삼아 작동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순환으로 받아 들이고 새로움이 아니라 반복에서 삶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새로움을 창출하지 못한다고 해서 늙어감을 결여와 박탈감으로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업에서 완전히 은퇴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뿐이기에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늙어 보인다는 말은 한 사람의 인격과 삶 전체를 부정하는 언어 폭력으로 수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공평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노화하고 결국 죽도록 예정되어 있는 생물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젊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소위 삶의 철학이자 지향점이다. 그런데 시간은 단지 흘러간다는 개념에 대해 반기를 든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논문에서 시간을 일반적인 과학적인 시간이 아니라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으로서, 양으로 측정하거나 쪼갤 수 없는 삶의 경험을 다루고자 했다. 시계란 시간의 경과를 시계 바늘 사이의 거리로 보여준다. 이는 시간의 경과를 공간화한 것으로, 사람들은 시계를 통해 자신이 시간을 얼마나 썼는지 혹은 낭비했는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시계 바늘은 동일한 시간만큼 흘러가고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첫 데이트를 하던 놀이동산에서의 5시간과 출장길에 타고 가는 비행기에서의 5시간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시간이란 이처럼 객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경험의 질과 차이를 구분해주지 못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추상적이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없는데 과학적 시간은 이를 객관화해서 처리하려는 것이다.
물체들에게 시간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물체는 다른 것들과의 작용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작용과 관계는 언제나 현재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짜 시간은 활동하는 의식이 곧 시간이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측정단위가 아니라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공간적인 과학의 시간과 구별되는 의식의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지속이라고 한다. 지속은 말 그대로 흐름이며 지나감이다. 흐르는 것은 명확하게 분절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잔절적인 점들이 쭉 이어져 있는 선이 아니라 마치 실제 연주되는 악기의 음처럼 서로 침투하고 다는 것들과 겹쳐지는 융합의 고정이며 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에게 체험 없는 시간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다. 일반화된 시간은 생활을 위해 구상된 의제적 시간이며, 나의 경험을 배제하는 바깥에서 부여된 형식에 불과하다.
기계적 시간과 달리 지속은 생명체가 겪는 의식의 흐름이자 생명의 변화다. 객관적이고 동일하며 하나뿐인 시간이 아니라 사람마다 서로 다른 복수로서의 시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보편적이고 유일한 시간에서 해방되어 자기의 시간, 흐르고 중첩되고 용해되는 지속을 나 스스로가 체험하는 것이다. 체험히고 직관하는 사람에게 시간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간이란 얼마만큼 썼는가?, 남았는가?, 경과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지금 현재에 어떤 태도를 취하게 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베르그송의 시간에 대한 개념과 설명은 내가 지금꺽 상식으로서 의심할 필요도 없이 믿어왔던 시간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일단의 단서는 그의 소르본느 대학 시절의 제자이였던 니코스 카잔카 키스의 자전적 소설인 '그리스인 조르바'로 그가 실제 인물을 만나면서 형상화 된다.
내 주위에 잘나가던 직장의 간부직을 던져버리고 평소 자신이 하고 싶어하던 음악 카페를 차린 사람이 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자신의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벌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돈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사기로 결심한다. 돈은 왜 벌어야 하는가? 나의 시간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다.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핸복하기 위해 돈을 벌고 있으면 돈으로 행복하게 만들 내 시간이 사라져버린다.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었는데 결국 사고 싶었던 시간을 날려버리는 이 황당한 상황을 사실 우리는 날마다 경험한다. 시간의 문제는 곧 우리 마음의 문제다. 냉장고의 가정 보급율이 선진국 중 프랑스가 가장 낮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인스턴트 식품을 선호하지 않고 풍부한 농산물을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소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에 덧붙여 식사시간을 가족, 지인간에 여유로운 대화의 장으로 인식하는바 빠름과 소비에 대한 강박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어떠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질문으로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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