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야만사회인가? 아니면 문명사회인가?
'인간은 동아프리카에 살던 한 원숭이에게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다윈과 고생물학자 이브 코팽스의 대답은 쌀쌀맞게도 형이하학적이다. 즉 그들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을 둔 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근대적 생명과학의 뿌리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은 사람들은 단지 사람과 원숭이의 조상이 같다는 사실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법칙, 자연선택의 원칙을 함께 배운다. 책을 덮고나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생존투쟁에서는 유리한 유기체만이 살아남는다. 그것이 자연선택 이론이다. 인간 사회도 결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약육강식은 과학적 원리다. 이기주의는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다윈주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그 이후에 강렬해진 모든 우익 이데올로기의 과학적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최근에도 다윈주의와 더불어 에드워드 윌슨이 유행시킨 사회 생물학은 인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위계적 우익의 이데올로기였다. 대부분의 경제학과 경영학 또한 다윈주의에 그 밑바탕을 두고 있다.
우익에 성장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만일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과 그를 추종했던 자들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과학사의 대가 패트릭 토르에 의하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놀랍게도 다윈은 그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에서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이 책에서 사회적 선택의 공간 안에서는 자연선택(도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문명을 위한 인간의 발걸음은 그 반대로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도태)을 도태시키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진화의 지도원리인 자연선택은 오히려 문명을 선택했고, 그 문명은 자연선택을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놀라운 역습이다.
다윈이 발견한 이러한 역설적 효과를 도트는 '진화의 역전효과'라고 명명했다. 문명화의 진전에 따라 점점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된 사회적 본능은 이타주의적 사고나 행동을 일반화하고 제도화하여 왔다. 가령 우리 사회가 아직도 진화의 역전효과가 충분하지 못한 야만의 사회라면 자연선택의 다윈주의는 현재진행형일 것이고, 문명의 사회라면 다윈주의의 역전이 우세한 사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문명사회에 적을 두고 있는가?
일등만 기억하고, 적자생존의 약육강식이 일반화된 동물원 환경에서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있는 것은 아닌가? 답답하다. 봄은 그리 멀지 않았는데 꽁꽁 얼어붙은 민중들의 마음은 여전히 풀릴 줄을 모르고 있다.
'인간은 동아프리카에 살던 한 원숭이에게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다윈과 고생물학자 이브 코팽스의 대답은 쌀쌀맞게도 형이하학적이다. 즉 그들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을 둔 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근대적 생명과학의 뿌리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은 사람들은 단지 사람과 원숭이의 조상이 같다는 사실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법칙, 자연선택의 원칙을 함께 배운다. 책을 덮고나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생존투쟁에서는 유리한 유기체만이 살아남는다. 그것이 자연선택 이론이다. 인간 사회도 결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약육강식은 과학적 원리다. 이기주의는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다윈주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그 이후에 강렬해진 모든 우익 이데올로기의 과학적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최근에도 다윈주의와 더불어 에드워드 윌슨이 유행시킨 사회 생물학은 인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위계적 우익의 이데올로기였다. 대부분의 경제학과 경영학 또한 다윈주의에 그 밑바탕을 두고 있다.
우익에 성장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만일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과 그를 추종했던 자들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과학사의 대가 패트릭 토르에 의하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놀랍게도 다윈은 그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에서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이 책에서 사회적 선택의 공간 안에서는 자연선택(도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문명을 위한 인간의 발걸음은 그 반대로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도태)을 도태시키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진화의 지도원리인 자연선택은 오히려 문명을 선택했고, 그 문명은 자연선택을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놀라운 역습이다.
다윈이 발견한 이러한 역설적 효과를 도트는 '진화의 역전효과'라고 명명했다. 문명화의 진전에 따라 점점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된 사회적 본능은 이타주의적 사고나 행동을 일반화하고 제도화하여 왔다. 가령 우리 사회가 아직도 진화의 역전효과가 충분하지 못한 야만의 사회라면 자연선택의 다윈주의는 현재진행형일 것이고, 문명의 사회라면 다윈주의의 역전이 우세한 사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문명사회에 적을 두고 있는가?
일등만 기억하고, 적자생존의 약육강식이 일반화된 동물원 환경에서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있는 것은 아닌가? 답답하다. 봄은 그리 멀지 않았는데 꽁꽁 얼어붙은 민중들의 마음은 여전히 풀릴 줄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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