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걷기, 저항과 혁명의 원동력

체 게바라 2012. 10. 13. 15:51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서명숙씨는 자신의 고향 아름다운 제주에 탐방길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실천에 옮겨 세계적인 명성의 제주 올레길을 탄생시켰다. 역사학적으로 중세는 걷기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순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중세에는 성지 예루살렘과 로마,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중심으로 도로가 발달했는데, 11세기에서 16세기에 특히 그리스트교 순례여행이 전성기를 맞았다. 12세기 교황 칼릭스투스의 비서쯤 되는 사람 에밀리 피코는 '생-자크-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는 이 시기 신의 가호를 믿는 순례자들은 길에서 맞닥뜨린 위헙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례는 확고한 신앙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겼고, 걷기를 통해 속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일 30~40Km를 걸었다. 

 

말을 탄 기마 전사와 귀족 계급이 출현하면서 걷기는 열등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덧칠해졌다. 이렇듯 인류 문명은 이동수단의 발전을 통해 진보해 왔다. 특히 18세기에 이르러 걷기는 귀족들이 거드름을 피우고 사치를 뽐내기 위한 산책문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걷기가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한 것은 뜻밖에도 혁명과 함께 찾아왔다. 말과 마차를 타고 세상을 다스리던 사람들이 이제 도보로 행진하는 파리 시민들의 손아귀에 놓였다. 혁명의 시대에 걷기는 혁명의 중요한 도구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구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팽배하던 파리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파리 시가지를 행진하며 부패한 왕족과 귀족들을 처형했다. 마틴 루터 킹의 위싱턴 대행진 등 저항의 상징으로 함께 걷기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후 걷기는 혁명과 저항, 항의와 공개적 반대의 수단으로서 상징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멀고 먼 땅을 갈망하며 도보여행을 하거나 등산을 하던 이들은 혁명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걷는 길을 많이 만들수록 창의적인 사회, 아이디어가 왕성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일요일, 아내와 괴산의 산막이길 편도 3.3Km를 걸었다. 괴산댐 호수변의 길을 따라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걸으며 호수로 내려온 단풍과 가을을 가슴으로 받아 들였다. 거짓처럼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