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구태의연한 일상에 균열을 가할 때 일상성은 우릴 구원한다는 말은 얼마나 상투적인가

체 게바라 2011. 10. 30. 23:20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떤 자리도 없다는 듯 일상성 속에 있다. 먹고 자고 놀고, 연애하고, 타인의 육체를 애무하고, 새끼들을 낳고, 미지의 것을 더듬듯 덧없는 글을 쓰고, 한 닢의 동전을 저금통에 떨어뜨리고, 임종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한 번의 성교나 한 잔의 맥주를 꿈꾸는 그런 일상 말이다. "일상성은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에 비해 과학은 사물들을 다루고 사물들 속에 거주하는 일을 포기한다. 과학은 현실적인 세계와 좀처럼 마주치지 못한다. 과학의 선입관은 모든 존재를 일반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반면에 개개의 특정성을 지닌 사물들과 마주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일상이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일상이란 문화에 매개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잠을 자고, 음식을 먹으며 언어를 사용하고, 여자를 끌어안던 아담의 일상이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 앞에 둔 카프카가 연인이었던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삶도 죽음도 아닌 그 저주받은 시간에 그가 철학적 관조로 자신을 달래고 있었을까? 천만에, 아니 올시다다. 그가 몰두한 유일한 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일상적 삶이었다. 세상 소식은 물가인상을 통해 접하고 있으며, 프라하 신문은 받아보지 못하고 베를린의 신문은 너무 비싸다고 그는 밀레나에게 불평을 한다. 죽기 직전, 그가 원했던 것은 누군가가 맥주를 힘차게 마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는데, 이는 바로 그 자신이 주말 저녁에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일을 적어도 눈으로나마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갉아먹어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낭비할 수 없는 삶은 끝끝내 철학이나 종교가 가져다줄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빛나는 법이 없다. 삶은 완성되는 법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끝도 없이 흘러왔던 대로 가버리는 어리석고 자질구레한 일상사가 배치의 머리통 같은 생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이런 구태의연한 일상, 평범하여 따분하기까지 한 일상에 구원 또는 모험이 존재할까? 일상과 구원이나 모험은 서로 손대거나 다가가지도 못하는 모순의 관계다. 본성상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무엇이다. 왜냐하면 구원을 욕망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일상적 삶 안에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구원이 구원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이미 누리고 있는 일상과는 다른 곳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상은 하이데거가 말하듯, 비진리의 자리이며, 우리는 진정한 삶이 부재하는 세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이곳은 무화과가 재배되고 먹을 것이 있으며, 노동과 월급이 있고, 노동이 화내지 않도록 적당한 휴식과 놀이가 있다. 아무런 슬픔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탐식과 과음이 한밤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검은 개처럼 따라가고 있다. 수많은 확신 없는 연애와 한숨과도 같은 이별이 있고, 혼자 늙는 위태로움을 젖은 종이배 같은 연금(年金)위에 살며시 올려놓아 보는 그런 나만의 구원의 기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는 가슴을 쥐어뜯는 애통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한가?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내는 저 겨울의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곳에서 지상의 삶의 가능한 최대한의 한계에까지 정답고 친절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악마가 들어오고 싶어 하는 듯 한밤중의 비바람이 게걸스럽게 핥아대는 중부 유럽의 저 오래된 침실 창문과 그 너머의 어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둠 이편의 따뜻한 침실에서 카프카는 정말로 안전하게 지상의 삶이라는, 즉 세계라는 한계를 조건으로 달고서만 자신의 행복을 표현했을까? 이 겸손한 만족을 표현하는 문장을 통해 그는 이미 지상의 삶의 한계 너머를(또는 배후를), 하나의 불안과 갈증과도 같은 희구를 암암리에 표현하고 있다. 나는 지금의 나이고 싶지 않다.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오직 당나귀만이 아무거나 긍정한다! 나의 자리는 비진리이다! 내가 아닌 삶, 아무런 삶....카프카 문학의 감동은 바로 이 아무도 아닌 삶, 그가 체념하듯 겸손히 받아들인 세계 안의 나의 삶의 배후에 숨겨진 또 다른 삶의 현실성과 생동감에서 올 것이다. 양도불능의 최후의 소유물 같은(즉 숨쉬기 위해 필요한 나의 호흡기관 같은) 일상이 실은 비진리의 자리일 거라는 불안은 카프카 문장들 속에만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예찬자.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지고의 과제로 여겼던 세속적 삶의 대가 라블레는 무엇이라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가?

 

과연 일상적 삶은 언젠가 구원이 도래해 변모시켜 주지 않는다면,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머무르고 마는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고, 사랑하여, 아이를 낳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주어진 일상이라는 지평을 한낱 구원과 상반되는 추락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먹고, 자고, 어떤 놀라운 이처럼 제 칠일에 휴식하며, 연애하고, 출산하는 것이 혐오의 대상이나 개선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오히려 구원은 일상 안에 이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즉 구원은 이미 제자리에, 즉 우리의 일상 안에 있었던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 점을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본래적인 실존이라는 것도 추락해 있는 일상성 위에 떠다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실존론적으로 단지 이 일상의 변양된 장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신들이 사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가지는 것은 결코 내세로의 허구적인 초월, 현세 너머로 이끌리는, 하늘에 있는 천국으로의 초월이 아니다. 구원은 일상의 변양된 장악, 모순된 용어들을 뒤집는 일이 용서된다면 내재성 안의 초월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일상 안에는 일상을 균열시키고 파열시키는 것. 일상의 나른한 평온함 속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사건들, 모험이란 이름에 응해오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험은 여전히 일상 안의 모험이지 일상 밖으로의 모험이 아니다. 일상이 깨어져나가리라는 위기, 일상 안에 무의미가 도사리고 있다는 위기가 일상의 저편을 건너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일상에 속한다. 즉, 일상성은 일상의 균열을 통해 특징지어 진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일상성은 부가적인 차원을 허용하지 않는 개념이며. 그러므로 구원이 있다면 일상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일상적 삶은 구원에 대한 전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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