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2010. 11. 20. 22:07

 

다시 마르크스다.

 

아니... 마르크스라고?

 

많은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 첨단의 시대에 마르크스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냐고 되물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내가 지금 마르크스라는 어쩌면 낡은 책장 한 켠에 놓여있는 먼지 쌓인 책 한권을 꺼내 읽어야 하는지.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최근 내 삶에서 부딪치는 많은 갈등과 고민의 끝에서 마르크스를 만나게 되는 때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첨단의 시대, 자본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에서 이제는 잊혀져버린 마르크스를 다시 떠올리는건 비록 혼자만의 고민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한사람의 노동자이다. 나의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으며 생활한다. 직장인, 엔지니어, 개발자, 혹은 서민이나 중산츨... 나라는 혹은 당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많은 사회학적 용어 가운데 가장 정확한 구분은, 적어도 내 생각에는 노동자라는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흔쾌히 노동자라고 부르지 못한다. 어쩌면 화이트칼라 노동자에게 노동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내가 피해적 계급의식에 물들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 나는 많은 갈등에 빠진다. 끝없이 높은 목표를 부여받고, 새로운 제품을 더 짧은 기간에, 더욱 싸게 개발해야 한다. 경영자들의 요구는 나라는 존재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까지 그 요구를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95%가 달성된다면 그 다음은 97%이고 또 그다음은 99%, 종국에는 100%의 완성도를 요구할 것이다. 그 순간 나라는, 개발자의 존재는 불필요해질 것이다. 나는 이런 조직의 요구를 '끝없는 탐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를 이렇듯 극한의 목표를 밀어붙이는 것은 일부 경영자의 개인적 요구는 아닐지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엔 CEO를 비롯한 일부 경영자들의 요구인 듯 하지만, 그들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주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지켜줄수 있는 대리인을 내세울 뿐이다.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해주기를 그들은 바랄뿐이고, 주주라는 익명의 존재들은 그 이익을 고스란히 가져간다. 물론 나와 같은 노동자들은 그 이익의 분배 과정에서 떨어지는 약간의 고물에 만족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나는 최근 마르크스에 관한 두권의 책을 읽고 있다. 김수행의 '자본론으로 한국 경제를 말하다'(시대의창, 2009)과 윤소영의 '마크크스의 자본'(공감, 2009년)이라는 책이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잊혀져간 마르크스라는 화두를 붙잡고 살아가는 어쩌면 서로 다른 두 좌파 지식인의 책을 읽게된 건 최근 나의 많은 고민들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한번 찾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내 책장 한 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는 '자본' 원전을 다시 꺼내들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는 것도 한 이유일듯 하다. 몇 가지 이유로 선택한 이 두 권의 책은, 그럼에도 너무나 극단적인 이유로 또다른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김수행의 책은 너무나 친절해서, 반대로 윤소영의 책은 너무나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윤소영과 같은 불친절함이 어쩌면 더욱 마르크스답다는 생각은 해본다.

 

김수행은 주류(?) 마르크스 경제학의 원로답게 무척이나 세련되게, 혹은 노회하게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문제를 서술해간다. 현실문제의 진단에는 공감하되 그 진정성에 있어서 의문점은 어쩔수 없다. 이에 반해 윤소영은 '과천연구실'의 자본론 세미나 자료를 모아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참으로 불친절한 책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2009년에 말이다. 총 5권에 달하는 무거운 '자본'원전을 다시 꺼내 읽기를 포기하고 고른 '자본론 해설서'였음에도 처음 원전을 읽던 때보다 더욱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건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 두권의 책을 조용히 머리맡에 내려놓으며,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내일 나는 다시 성실한 노동자로 또 하루를 살아갈것이다. 나름 인정받는 직장인의 모습으로, 한 분야의 전문 Eng'r로 이룬 작은 성취에 작은 만족을 느낄 것이다. 매달 월급통장에 찍히는 무표정한 숫자에 위안을 삼을 것이며, 가끔씩 던져주는 성과급과 보너스에 기뻐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조여오는 실적과 목표에 고통받으며 나와 내 후배들을 닦달할 것이다. 그러다 가끔 스쳐가는 바람처럼 일탈을 꿈꿀 것이며 마르크스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살아간다. 처음 마르크스를 읽었을 받았던 환의와 충격 - 시대와 세계를 철저히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던 탁월한 지성과, 세계의 변혁을 추동해냈던 그 빛나는 언어들을 - 을 떠올려본다.

 

2010년 오늘, 나의 괴로움을 잠시 달래주는 위안으로 마르크스가 읽히는 이 눈물나는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에 <자본론> 4권을 완간한 강신준 동아대교수는 마르크스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강 교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이행"이라고 요약했다. 프랑스혁명으로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를 얻었지만 그를 통해 얻어낸 경제적 부를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취함으로써 자본독재라는 모순이 발생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시각. 그런 맥락에서 한국 대기업들의 지배구조는 문제투성이다. "널리 퍼진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는 결코 반(反)기업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업이 커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커진 기업을 소수가 좌지우지하는 것을 문제시한 것이지요. '소유의 민주화'라는 < 자본 > 의 핵심 메시지는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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