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변증법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는 변증법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변증은 개념의 분석을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은 대화 또는 토론의 뜻을 더 많이 지니게 된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변증법의 어원은 대화로 되어 있다. 대화 또는 토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갑은 A를 주장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을은 A에 반대되거나 A가 아닌 B를 주장한다. 그래서 A냐 B냐를 두고 토론을 하다가 결국은 A도 B도 아닌 C를 택하게 된다. C는 A와 B를 합친 것이면서도 A와 B를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나타나 C를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것은 D라고 말한다. 그러면 C와 D를 두고 토론하던 두 사람은 C도 D도 아니면서 그것을 합쳐 초월하는 E의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은 더 높은 차원의 결론으로 유도, 발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대와 대립에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는 대화와 토론의 기능,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모든 저서는 대화법으로 되어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계속되는 대화에서 명백하고 믿을 수 있는 개념을 얻어내는 것을 변증적 사고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킨 것이다. 인식과 역사는 물론 철학적 존재론에까지 확대시켜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변증법의 방법은 논리학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헤겔의 "논리학"을 다른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논리학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헤겔에 있어서는 그것은 논리학이라기보다는 논리학을 포함하는 변증법이며 변증법 자체가 그의 철학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그로부터 어떤 사상이나 예술관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정(Thesis)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다. 괴테와 셰익스피어 사이에는 서로 어긋나고 반대되는 점이 있었다. 괴테는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반(Anthesis)의 위상에 속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대립시켜보면서 더 높은 제 3의 사상이나 예술관을 갖게 된다. 그것은 정과 반의 합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다. 만일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즉 반이 없었다면 양적으로 더 많은 지식은 얻을 수 있으나 질적으로 더 높은 것은 탄생되지 못한다. 그 다음에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하자. 그 때는 합의 위치의 지식이 정이 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의 자리를 차지해 또 하나의 높은 차원의 사상과 예술관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인식과 지식이 성장,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견해를 변증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카톨릭의 위치로 굳어져 왔다. 그 안에 갈등도 생기고 모순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루터 같은 종교 개혁가가 나타나 반카톨릭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카톨릭은 루터를 파문에 처하고 추방해버린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크게 성장해 마침내는 카톨릭과 동등한 세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두 갈래의 대립상대를 만들게 되나, 결국은 그 때문에 기독교는 더 성숙되고 원만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러버린다면 카톨릭이라는 어머니는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에서 발전에의 과정을 역사에서는 언제나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 작용을 변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변증법이 인정받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하게 되는 것은 동질적인 내용은 변증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대되는 내용들은 어느 정도 대립과 변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모순관계는 반드시 변증적 발전을 일으킨다. 그래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의 논리를 현실화시켜 나간다. 반대개념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은 중간 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유와 무는 중간이 없는 모순관계이다 모순은 논리에서는 항상 비라는 개념을 동반한다. 유와 비유 같은 헤겔의 애용개념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변증법적 사고는 있을법하고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을 수정, 발달시킨 대표자가 마르크스였고 키에르케고르였다.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 즉 정립 반정립 종합의 3단계를 말하는데 변증법이란 세계를 유동, 발전하는 모습으로 보고 이것은 사물 그 자체에 내포하는 모순, 대립을 지양하여 보다 높은 데를 향해 종합하는 운동이라고 보는 논리다. 변증법의 기본전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속적인 반복, 끊임없는 모순의 생성과 지양을 통해 변화 발전한다는 창조적 발전의 논리다.
헤겔의 변증법은 일련의 3단계운동이다. 즉 정립, 반정립, 종합을 통해 진리를 찾아나가는 역동적 논리이다. 모든 정립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된다면 그것을 스스로의 반정립 속에서 보게 될 것이다. 즉 모든 사실은 그 대립자들과 요컨대 정립이 아닌 다른 사물들과 연관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참되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대립자 즉 그것의모순과 맞부딪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관념을 그것의 대립자와 관계시키거나 통일시킨다면, 우리는 그것들의 그 이전의 외딴 의미를 넘어서는 그것들에 관한 또 다른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3단계운동의 변증법은 절대자에 다다르게 되기 전까지는 논리적 과정으로서 부단히 계속된다. 절대자에 도달하는 과정은 대립자들을 종합하는 과정과 똑같다. 그러나 대립자들의 종합은 그 각각 다시금 새로운 정립이 되고, 이 새로운 정립은 부정성의 원리에 따라서 그것의 대립자와 관계를 맺게 되고, 이러한 식으로 하여 보다 충만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두 대립자는 다시 결합하여 또 다른 새로운 더욱 큰 종합을 이루게 되고, 이 종합은 다시 더욱더 새로워진 삼단계운동의 출발점, 즉 그것의 정립이 되는 것이다. 변증법이 그것이 할 수 있는 온갖 잠재적인 적용들을 다하고 나면, 비로소 그것은 통합된 전체적인 절대 진리를 노정시키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우주속의 모든 가능한 관계들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 체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은 세계정신의 전개과정이기 때문에 정립과 반정립을 종합으로 통일시키는 일은 끝없이 계속되게 마련이다. 세상만물은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상호작용을 미치고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질량이 있는 물체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 상호작용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세상만물을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든다. 태양과 지구의 만유인력의 결과로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위치변화를 하게 된다. 또한 상대성원리에 따라 태양도 지구에 대한 위치변화를 하게 된다. 그러면 사물의 운동법칙은 불변인가? 뉴턴의 운동법칙은 불변의 진리라고 하였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 주변에서 시간과 거리의 정의는 변하게 되며 따라서 뉴턴의 운동법칙도 변하게 된다. 칸트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이다.
세상만물은 변하지만 그 변하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 유기물이 분해되는 속도가 무기물이 분해되는 속도에 비해 일반적으로 빠르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서 변하는 속도가 빠르다. 이러한 변화속도의 차이는 서로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변화가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변화의 조건과 속도의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변화가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보수주의자들은 세상의 변화가 자기들이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세상의 변화가 자기들이 참아줄 수 있을 정도로 빨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주장은 서로 모순된 것이며 서로 갈등하며 대립하게 된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대립하고 통일될 때 변화가 이루어지며 이러한 상호연관과 작용,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이고 "정과 반이 서로의 모순을 지양하여 합으로 나간다"고 정의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에는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있고, 서로간의 억압이 이루어지고 있는 계급이나 민족 간의 모순은 적대적이어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고 투쟁을 통해 어느 한쪽이 완전히 배제될 때 해소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현 시대와 같이 핵무기로 중무장한 시대, 또 발달된 무기로 인해 인간에 대한 살상력이 극도로 발달된 시대에 적대적 방식의 모순해소란 인류의 공멸을 의미하게 되고, 비적대적 방식의 모순해결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여성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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