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신경림-쓰러진 자의 꿈

체 게바라 2009. 4. 18. 23:31

 

 

 

 

어둠이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

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우리들

이렇게 재재발거리며 달려나가는 까닭을

눈이 부셔 비틀대면서도 진종일

서로 안고 간질이며 깔깔대는 까닭을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깊이 숨은 소중하고도 은밀한 상처 꺼내어

가만히 햇볕에 내어 말리는 까닭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지 않는다

 

 

         落日

 

 

새말갛게 떠오를 때는 기쁨이 되고

뜨겁게 담금질할 때는 힘이 되었지

구름에 가렸을 때는 그리움이 되고

천둥 번개에 밀릴 때는 안타까움이 되었지

비바람에 후줄근하게 젖어 처지기도 하고

어쩌다가는 흉하게 일그러지기도 했지만

드디어 새맑음도 뜨거움도 홀연히 잊고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훌훌 떨쳐버리고

표표히 서산을 넘는 황홀한 아름다움

 

말하지 말자 거기서 새로 꿈이 싹튼다고는

 

 

          *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중에서,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