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정의와 정의의 조건

체 게바라 2009. 3. 29. 14:03


〔정의와 정의의 조건〕

시대를 관통하고 이끌어가는 화두, 핵심 개념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세계화, 선진화, 자유, 성장 등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반신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생, 복지 등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정의, 공평, 공화주의, 공공성, 거버넌스(governance) 이런 개념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이 시대의 흐름이나 우리의 역사적 현실로 볼 때, 국가와 민족을 강성하게 하고 국민복리와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국가발전전략의 중심 기둥이 될 거라 보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은 ‘화두참선’이라고 한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성철 스님은 화두참선을 필생의 가르침으로 강조했고, 출가하면서 ‘참선 잘 하거라.’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교수신문은 2009년 새해의 희망 사자성어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선정했다고 한다. 소수를 존중하면서 다수가 이끌어가는 민주주의 정치과정의 핵심적 운용원리라 할 만한 화이부동에 조화와 통합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고 한다.

 

청와대는 새해 화두로 “위기를 맞아 잘못을 바로 잡고, 나라를 바로 세운다.”라는 뜻의 ‘부위정경(扶危定傾)’을 선정해 발표했다. 경제위기 극복의 의지를 재확인한 듯하지만 ‘강압적으로라도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일종의 ‘마이웨이’를 선언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아무튼, 이번에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여러 화두 중에서 ‘정의’의 문제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정의와 정의의 조건」이라는 책에 기대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이 책의 저자인 김우창 교수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이해와 심미적 이성의 사유 노동으로 일관하면서 구체적 보편성을 추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인문학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인권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의 강연을 기초로 수정 보완한 것이라 한다.

 

현대 사회는 세계화에 따른 수많은 변화에 직면해 있다. 그 변화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든, 그러한 변화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의(正義)이다. 정의는 드러나든 숨어있든, 우리 사회의 중심적인 화두이다. 이것이 사회의 핵심원리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 김대호 소장은 공정과 공평을 핵심 지주로 하는 정의는 흐릿한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창이자 방향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반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롤스는 정의를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하여 ‘정의론’의 중심과제는 “어떤 차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의는 법의 경계에 서서 법의 한계와 법의 근본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리하여 법의 정신과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해 왔다. 정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루어질 때, 사회는 비로소 정당한 법률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정의를 유지하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작업이 왜 가치 있는지를 사유하면서 정의의 현대적 조건을 탐문한다. 정의는 이성적 측면뿐만 아니라 감성적 측면을 동반하기 마련이라 단순하게 공식화될 수는 없다. 각자가 제기하는 정의의 협소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정당성의 개념을 다른 개념들과의 연계 속에서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이 작업은 정의는 수호되어야 하지만, 이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그 개념의 복합화를 시도한 것이다.

 

<시장의 자유와 그 모순>

 

시장은 어떻게 공동체를 배려할 수 있는가?

오늘날과 같은 힘의 세계에서 배려는 힘이 아니라 생각의 세계의 일이다. 그렇다면 배려라는 생각의 세계의 일을 어떻게 현실의 힘에 이어지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생각으로 힘을 구성하는 일은 대체로 생각의 이념화를 요구한다. 이념은 많은 경우, 생각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시장 또는 일정한 범주에 포함되는 모든 사람에게 정당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적 존재와 관련해서는 정의의 이념의 뒷받침을 찾게 된다.

 

기업행위의 사회적 효과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기업의 생산 활동이 국부를 만들어내고, 직장을 만들어내고, 생활필수품과 기타 소비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여러 편의를 만들어내는 것도 기업의 생산 활동의 결과이다. 이것이 시장을 매개로 하여 소비자의 삶에 연결된다는 것도 사회생활의 주조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일의 하나이다.

 

시장의 의미는 선택의 자유를 원칙으로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선택의 자유는 경쟁을 촉진하고, 경쟁은 가격의 억제와 생산품의 다양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유주의가 예찬하는 것이 이것이다.

 

시장의 자유의 한 결과는 시장 또는 기업이 규범을 벗어난 자의적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의적인 것이면서도 인간적 자유의 기초가 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의 자유는 비교적 평온한 사람들의 상호관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이 자유에 근거하여 어떤 부분이 거대화될 때, 그 자유는 오히려 실질적 내용의 자유를 크게 손상한다. 시장의 자유에서 성장한 기업의 거대화와 독점화, 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에서의 기업의 총체적 거대화가, 개별적 인간들의 자유의 내용을 왜곡하게 된다. 이 왜곡은 자유의 공간으로 생각 되었던 시장, 거기서 일어나는 소비에서만이 아니라 생산 활동과 그 조직에서도 일어난다.

 

<시장질서와 공평성>

사회공간 안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다른 여러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타협은 불가피하다. 이때 타협의 원칙은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공평성 또는 공정성이다.

 

자유와 공동체적 윤리의 문화는 오랜 내적 성숙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의 내면화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역사과정이다.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서 아무 준비 없이 윤리적 규범이 재도입될 수는 없다. 인간 삶의 윤리적 고양화는 삶의 규칙들의 기초가 진정한 의미에서 외면에서 내면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자유가 존재하는 복잡한 관계망과 그 변증법이 시장의 자유의 경우에도 작용한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공정해야 한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이성적 원칙에 의하여 움직이는 총체적 질서 속에 있어야 한다. 공정성이나 이성은 시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질서의 원리이고 시장에서의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에 반영된다.

 

<시장권력과 정의>

시장의 자의와 횡포를 제한하는 법과 제도가 현실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제도에 대한 존중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현실성은 대체로 이성에서 나오는 존중보다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강제력에서 나온다. 자유주의 체제하에서도 국가권력의 뒷받침이 없이는 자유로운 사회공간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자유는 법과 제도 하에서 구성되는 자유로서만 현실성을 얻는다.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 사회행동을 격려하는 이념화된 생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금에 와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신성한 집단범주는 민족이다.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이는 자의적 행동의 한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이라는 말 또는 범주는 시장의 정당화나 그것의 자의성을 제어하는 당위성의 언어로도 동원될 수도 있다. 경제발전이 민족중흥 또는 부국강병의 이념의 일부가 된다거나 세계화에 대하여 보호무역주의가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연결을 보여준다.

 

집단의 범주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과는 필연적 관계가 없는 도덕적 윤리적 당위성을 함축하는 이념들도 있다. 민주주의, 그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와 평등, 우애, 인권 등이 모두 그것에 해당한다. 또는 인도주의적 가치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집단적 범주, 정치이념의 일부가 된 개념 또는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도구이면서 사람들에게서 일정한 행동의 수행을 요구하는 언어들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인식론적 타당성 이상으로 정당성의 주장이다. 이 정당성을 그 자체로 이념화하는 개념이 정의이다. 사실 정치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는 정의를 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생활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테두리가 된 현대에 와서 모든 것이 평평하고 고르게 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이념이 중요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역사, 문화와 사회에 따라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 정의는 가장 큰 정치의제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하면서 거기에서 발생하는 생존과 사회의 문제를 시장원리를 넘어가는 정치적 대책으로 해결하려는 제도이다. 물론 이때 국가권력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과 제도 속에서 움직인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간에 정치권력의 문제는 사회질서 속에서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정치권력의 사회현실 개입은 법과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은 다시 일정한 이념적 정당성으로 뒷받침된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든지 정당성의 힘을 전유하는 것은 권력에 이르는 길이 된다. 이념화된 정당성은 전체주의적 권력이나 비슷하게 구체적인 인간현실을 왜곡한다. 또, 그것은 그 정당성의 성격에 따라서는 사회의 성격 자체에 좋지 않은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념은 사람의 마음의 소산이다. 사람의 삶에서 마음은 주체성을 수립하는 데에 주축이 된다는 것 외에 대상세계에 대하여 유연한 대처를 가능하게 하는 실용적 기능을 갖는다.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이고 독단론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그것은 거의 현실 전체를 대체한다. 그리하여 유연한 현실이해에 문제를 일으킨다. 이데올로기의 직접적 기능은 인식의 속기술이 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에서이다. 그 현실의 관념적 재구성은 곧 현실의 실천적 재구성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마음의 사고의 소산으로서의 생각이 개념화되고 이념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변용은 사회적 활동의 동기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것은 이념화하는 생각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을 다시 한 번 마음의 유동성 그리고 사물의 유동성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그것은 비판적 검토 속에서만 유연성을 유지한다.

 

<정의, 정의 사회>

정의는 드러나든 숨어있든, 우리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화두이다. 이것이 사회의 핵심원리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극단의 정의가 극단의 손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해 공식의 정당성을 철저하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내는 명제의 정당성의 주장은 거의 모든 사고와 언어작용의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오랜 마음의 습관이고 사회적 요구로 보인다. 그러나 그 위험을 조금이라도 피하는 방법은 여러 정당성의 개념을 다른 개념들과의 연계 속에서 보는 일이 아닐까한다.

 

인권의 뒤에는 정의의 문제가 있다. 인권을 보다 넓게 뒷받침하는 정의는 더욱 여러 관련 속에서 이해됨으로써 중요한 인간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정의는 수호되어야 한다. 이것을 시인하면서도 그 개념의 복합화를 통해 정의의 조건을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정의는 동양정치에서 오래전부터 정치의 근본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라는 말에 들어있는 정(政)이 바르다는 정(正)이라는 공자의 말이나 바른 정치의 의제는 이(利)가 아니라 의(義)라는 맹자의 말은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다만 오늘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정의는 이(利)의 공평한 분배를 포함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공평하고 평등한 권리를 인정한 위에 그들 사이의 일정한 배분적 균형을 말한다.

 

정의의 질서를 확보하는 데에 있어서 복수심이나 분개심의 역할은 시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마치 정의의 항구적 기초가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자기성찰의 부족을 나타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의 조건, 분개심의 정의를 넘어, 사랑의 질서>

정의도 그 자체 못지않게 그것을 보장하는 환경이 중요하다. 정의의 사회는 고립된 개인들이 자신의 방어를 위하여 모든 힘을 동원하는 개인들의 집합, 권리의 벌집일 수는 있으나 편안한 마음의 상태에서 즐길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 사회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형제애에 입각한 행복한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

 

정의는 어쩌면 폭력을 이성적으로 조정하는 개념이라고 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회정의를 구체화하려는 정부의 기구들은 분개심을 기초로 하든 동정심을 기초로 하든, 근본적으로 제3자의 객관적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물론,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이런 관점은 타당성을 잃을 것이다)

 

정의는 부정의의 시정을 넘어서 보다 넓은 인간적 질서-모든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의 넘침 속에 존재하는 질서-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때에 참으로 인간적 삶을 위한 수단이 되고 그 수호신이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의의 움직임을 다른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이상들이나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하여 스스로를 재정립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를 포함하여 모든 도덕적 당위는 자칫하면 펴지 못한 자아의 학대를 위한 원한의 기획으로 변할 수 있다. 원한의 복수는 그런대로 사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위험한 것이 되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 전체화의 기획이 되는 것이다.

 

진리에서 중요한 것이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보편적 요구이기를 그치지 아니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개별자들의 주어진 그대로의 현실, 그리고 그것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긍정적인 것이 되려면- 즉, 그것이 권력의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공존의 관계가 되려면 - 그것은 인간적 공감과 관심을 통한 인정과 존중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전체로서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질서는 이익의 공동체일 수도 있으나, 아마 진정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넘어가는 이상적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질서이다. 정의의 질서도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원리가 되려면 궁극적으로 사랑의 질서에 일치하는 것으로 자기변용을 이루어야 한다.

 

<정의의 실천>

1) 진실과 화해의 기획

진실과 화해도 넓은 의미에서의 부정의 긍정에로의 변용의 일부 또는 단초가 된다. 진실과 화해는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기하자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칫하면, 분노와 분개심(ressentiment)의 분출에 그칠 수 있다. 그것의 승화에는 진실을 찾는 오늘의 입장의 전화가 필요하다, 과거의 진실은 분열을 하나로 합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터전으로서의 자아의 반성과 정화가 있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 부정의 질서는 보다 큰 긍정의 질서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의 근본은 사실의 정확한 이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다른 여러 문제, 죄와 벌, 행위와 책임, 사과와 용서, 진실과 화해 등의 정치적이고 윤리적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시작될 수 있다. 모든 의미 있는 실행과 실천은 현실에 관계된다. 현실은 사람의 행동영역인 현재와 미래로 구성되고, 과거는 이 두 차원에 관계되는 한에서만 현실적 의미를 찾는다. 그 관점에서 사과의 의미는 실질적 보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질적ㆍ실천적 차원이 없는 경우, 사과는 상징적 의미만을 갖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삶과 현재적 행동의 영역에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살풀이가 아니라 보다 현재의 실천을 위한 것이라면, 큰 미래의 비전을 위해서 의미를 갖는 것일 수 있다. 즉, 그것은 사랑의 질서의 비전에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2) 인권과 사회권

정의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를 확대할 때도, 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주제이다. 거꾸로 정의로운 정치질서를 생각할 때 인권의 문제가 저절로 일어난다고 할 수도 있다. 인권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개념의 뿌리와 현실에 대한 정치학, 국제정치학, 국제법, 법, 역사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활동의 특수한 행동방식이다. 그것을 정의추구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체의 정의보다는 부분적 정의를 추구한다. 그것은 전체성의 부름의 거대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 부분적 활동 또는 자기 한정적 활동이 오히려 현실을 바로 잡아가는 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예시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사회의 혁명적 변화의 모델이 된 미국혁명이나 프랑스혁명 등은 인권 또는 기본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사회의 정치조직 전체가 개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정치운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권의 문제는 대체로 정치체제 전반에 관련해서 제기 되기보다도, 책임이 정치체제 그것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경우라도, 그때그때 일어나는 침해사건에 대하여 제기된다. 그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도 대개는 무력을 가진 국가라기보다는 민간인들이 주동하는 단체 또는 비정부 인권단체들이다.

 

인간의 개체적 삶을 규정하는 테두리는 가장 큰 테두리로서 보편적 인간의 이념에 관계되는 것이 있고, 국가가 규정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인간적 이념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현실적 이념은 국가의 테두리 안에 수용된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인권은 이 중간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성이라는 테두리에서만 직접적인 연결을 가지고 생각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약한 개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한 개념이 된다.(적십자 활동의 폭은 바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큰 테두리와의 관계에서 중간적 집단의 테두리를 간과하는 데에서 온다. 이것은 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인간됨에 대한 정의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다르게 된다. 인권에서의 인간됨의 개념이 인간에 대한 완전한 기술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권에서의 인간개념은 최소한도의 것이고 대체로 최소한도의 것에 대한 침해에 관계하여 이야기되는 것이다.

 

인권문제와 인권행동은 체제 전체의 경계선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어설 수 있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강한 힘만이 아니다. 약한 힘이 오히려 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에 작용하는 진정한 큰 힘이 ‘약력(weak force)'이라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인권의 문제는 지나치게 큰 개념으로서의 정의 일변도의 이념 하에서는 풀어갈 수 없는 문제 일수도 있다. 인권운동이나 국경을 넘는 인도주의적 구조 활동 등에서 볼 수 있는 부분적 정의의 행동화는 나름대로 위대한 인간적 실천의 하나라고 보아 마땅하다. 우리는 거대한 정의의 추구만이 정의를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거대한 사랑 안에서 작은 행동이 오히려 현실적 효율성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인권운동이 사람 사는 문제의 모든 것을 풀어줄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권이 해결할 수 있는 삶의 문제는 상당히 제한된 것이다. 인권은 한 가지 권리가 아니다. 인권에는 여러 가지 권리가 포함되고 그 개념화는 내용에서나 역점에 있어서 문화와 역사와 더불어 변화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는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로 나눌 수 있다. 인권은 대체로 정치적 권리에 속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령, 표현의 자유라든가, 신체의 자유, 참정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에 속하지만, 그것들은 현실국가의 제도에 의하여 규정되어야 하고, 그 구체적 내용은 국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인권의 관점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대체로 국가가 규정하는 정치권에 대한 도전이 있고 그로 인하여 국가적 범위를 넘는 관점에서 침해가 일어나는 일이 발생했을 때이다.

 

사회권의 문제는 보통 인권활동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제적 관점에서 그러하다. 정치적 권리는 간단한 조치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지만, 사회권은 간단히 요구되는 특정사항의 실행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 쉽게 인권활동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한 사회현실과 구조, 국가의 내적 사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접근되는 방법은 인권의 방법에 유사한 데가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인권의 문제처럼 부정적 현실에 대한 대응조치로 접근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인간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기본적인 필요는 정치권보다도 사회권에서 표현된다고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 그것은 정치권 그리고 인권과의 모순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

 

사회적 권리란, 제도적으로 사회보장이나 사회보호ㆍ사회구조를 포함하고, 정치적 권리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나 노동현장에서의 여러 권리들에도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나, 더 넓게는 생존의 기본수단 일체에 대한 사회적 보호나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이다. 이러한 생존권이 사회적 권리라고 불리는 것은 오늘날 생존이 사회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권의 문제가 체제의 경계-지금으로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국가적 행동, 비정부단체들의 행동의 표적이 되기 어려운 것도 그것이 사회와 국가의 적극적 의사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저항운동의 결과로 구성될 수 있지만, 그것이 보다 적극적인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은 다분히 사회 안에 존재하는 정신문화의 힘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3) 인간적 배려가 있는 기업

사회권의 확보는 국가의 능동적 작용에 의지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물론 사회적 요구를 국가제도가 수용하게 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사회권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질서에서의 정의에 대한 요구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것은 기업이다. 기업활동은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혼란시킬 수 있는데 이 혼란의 가능성에 대응하여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 국가에 의한 사회권 확보의 노력이다. 이 노력에 정의가 어떻게 작용해야 효율적일 수 있는가? 이것이 권력과 이념화된 정의의 폐단을 피하면서 정의로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배려’라는 말은 시장에 국가권력 이전에 심성적 기능이 개입하여 사회적 질서의 구성에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다. 기업과 시장이 사회의 사회적, 공동체적 그리고 인간적 성격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더 나아가 그것은 절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과 기업의 중요성도 너무 낮게 말할 수는 없는 까닭에 기업에 대한 사회성의 요구는 매우 조심스럽게 연구되어야 하는 일이다.

 

기업이 사회를 고려하면서 기업활동을 하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권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력의 전체화는 경제의 기능을 둔화시키고 부패를 가져오며, 또 인간의 자기실현의 근원적 욕구로서의 자유와 창의성을 압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공권력이 직접적인 큰 간섭 없이 기업으로 하여금 그 생산활동을 넘어 사회에 기여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현대적 기업과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이윤의 동기이다. 이윤의 동기 이외에 자기이익의 동기로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명성의 동기이다. 독일의 사회이론가 악셀 호네트의 ‘인정욕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기업가로 하여금 교육, 의료, 복지, 자선 등의 목적에 일정한 기여를 하게 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업의 확장, 부의 축적의 최종 목적이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목표에는 이미 실질적 권력과 명성 등의 상징적 권력 그리고 인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것은 사회의 관습으로 확립된 가치체계와 문화 속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기업의 비사회적 목적의 추구는 이미 사회관습과 문화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업의 비사회성은 근본적으로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이 기업활동 외의 사회 기여를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사회 전체에 걸치는 또 지속적인 기여라기보다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하는 일은 기업의 의무라기보다는 정치의 책임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정부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한다는 독일의 ‘사회국가’의 개념은, 경제와 정치의 이항적 구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을 필요는 사회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업에서 오는 것이기도 한다. 최소한도의 사회적 안정과 동참의식이 없이는 기업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의와 공동이익 또는 공동선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기업에 손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겸하는 일은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선의의 문화는 천부의 인간심성에 기초하면서도 사회자산으로 축적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러한 노력이 사회의 중요한 활동부분으로 존재하고 존중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기업가도 일반시민도 이 인간적 문화의 부재 속에 또는 말이야 어떻게 하든 실제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투쟁과 부정의 관점에서 보는, 뒤늦은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문화 속에 산다. 또 이것만이 아니라 많은 사회결정론적 인간행위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전략을 정당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좋은 사회는, 정의의 사회이면서 사랑의 질서 속에 있는 사회이다. 이것을 어떻게 문화의 근본이 되게 하느냐 하는 것은 가장 크고 어려운 과제의 하나이다. 좋은 사회가 되는 데에 현실의 여러 힘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바른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 이해 속에 움직이게 하는 노력은 형이상학적 인간 해명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 문화, 교육과 제도의 문제이다.

 

(정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

민주주의적 사회제도의 가장 본질적 특징은 정의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는데 있다.

민주주의적 사회관계의 장점은 그것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주적인 사회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담보할 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공동의 이해관계를 보장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성원들의 지위와 역할을 평가하는 데서 사회 공동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지금 현재 우리 민주주의는 아직 정의의 원리를 완전히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당면하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하는 데서 의거해야 할 기본방침은 정의의 원리를 더욱 철저히 구현하는 것이다.

 

정의의 원리의 적용범위와 포괄범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 사회의 공동의 주인으로서의 개인의 권리보장문제와 사회공동의 주인으로서의 공동의 이익을 옹호하는 의무문제가 동등한 비중으로 중요시 되고 실생활에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회공동의 이익의 범주 안에 주로 현세대들의 경제생활상 이해관계만이 포함되어 왔지만 앞으로는 정신문화생활과 정치생활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다같이 균형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며 미래 세대들의 이해관계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정의의 원리의 적용범위와 포괄범위를 확대해 나가면 민주주의가 개인적 존재로서의 요구와 집단적 존재로서의 요구를 다 같이 충족시키는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경쟁에서 이긴 편이 진편을 사회발전의 요구에 맞게 자진하여 도와주는 것이다. 승리자가 패배자를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협력과 통일을 강화하여 사람들의 행복의 수준을 높이며 사회발전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리를 관철해 나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정의의 원리에 모순되지 않는 한도에서 사랑(나눔)의 원리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세계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첫 번째로 생산력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생산력의 발전수준이 곧 사회발전의 객관적 조건과 가능성의 발전수준이며 생산력 발전은 사회발전의 기초가 된다. 즉, 생산력 발전을 떠나서 세계의 당당한 주인으로 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의의 원리는 사회공동의 이익을 잣대로 하여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을 평가하는 원리이다. 사회공동의 이익은 어느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성원 공동의 이익이라는 점에서 공적인 의의를 가진다. 정의의 원리가 포괄하는 사회적 범위가 확대될수록 개인적 존재의 이익과 사회적 존재의 이익의 통일의 수준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정의의 원리는 사회공동의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정의와 부정의를 가르는 원리이다. 정의의 원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기만을 억제하는 엄격한 법질서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음으로, 정의의 원리를 구현하는데 중요한 것은 사회공동의 이익의 내용을 사회발전의 수준에 상응하게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집단의 이익을 균형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에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인정하는 정의의 내용도 발전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정의의 원리가 개인적 존재의 이해관계와 집단적 존재의 이해관계를 균형적으로 실현해 나가는데 이바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사회공동의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정의와 부정의를 가른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사회공동의 이익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의 원리는 동등한 대가를 전제로 하는 등가교환, 등가보상의 원리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사랑의 원리는 공동의 운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대가를 초월하여 헌신적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원리이다. 정의의 원리가 주로 개인들의 자주성과 창의성을 발양시켜 개인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하는데 이바지 한다면 사랑의 원리는 집단의 결합과 협력을 실현하여 집단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하는데 이바지 한다고 볼 수 있다. 정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는 서로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다 일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진다. 이 양자는 인간의 생존과 발전을 더 잘 보장하는 방향에서 서로 결부되어 상호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의 원리를 철저히 관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의 원리의 도움이 필요하며 사랑의 원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원리의 관철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의 원리만으로는 정의를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정의의 원리에 따라 일한 만큼만 분배받으면 경쟁력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이 차이는 정의의 원칙에 맞는다. 그러나 정의의 원리만을 인정하고 사랑의 원리를 부정하게 되면, 결국 대가를 전제로 하지 않는 헌신적인 활동은 다 부정하는 것으로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안전 보장과 미래발전을 위한 사업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사회라는 집을 건설한다고 볼 때, 먼저 정의의 원리에 의거한 민주주의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인간사회의 튼튼한 기초 건설로 된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을 억제하는 정의로운 법적질서를 세우지 않고서는 자주적인 인간의 결합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의 원리에 기초한 법적체제의 건설이 민주주의 건설의 첫째가는 과업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정의의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법적질서를 세우는 사업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조건과 가능성이 조성됨에 따라 사랑의 원리를 구현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세계의 민주화는 정의의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주도적 역할을 보장하면서 전반적 사회발전 수준에 상응하게 사랑의 원리에 기초한 통일성을 확대해 나가는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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