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말에는 이명박 정부 1년을 평가하는 토론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보수 인사들이 모여서 하는 토론회를 가보면 ‘잃어버린 10년’, ‘10년 좌파정권’이 약방의 감초다. 진보 인사들 토론회에서는 ‘10년 신자유주의’, ‘세계적 금융위기와 30년 신자유주의의 퇴조’가 약방의 감초다. 나는 보수든, 진보든 이런 식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보는 한 MB정부의 실패 가능성은 100%, 진보개혁 세력의 재기 가능성은 0%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참여정부의 좌절로부터 정확하고 풍부한 교훈을 얻는 정치세력 쪽에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수많은 통계와 다양한 사회현상을 종합하여 한국 사회를 분석 해왔다. 많은 논객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참여정부와 진보개혁 세력의 오류와 활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왔다. 다른 논객들이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라서 그렇다 쳐도, 코끼리 전체를 봤다고 자부하는(어쩌면 착각하는) 내 논지조차도 간단하게 정리되어있지 않다보니 선명하게 뇌리에 박히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찾다보니 내 논지를 간명하게 설명하는 좋은 모델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빙산 그림이다.
빙산은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상징한다. 동시에 대중의 요구, 기대, 불만, 고통을 상징한다. 본래 빙산의 90%는 수면아래에 있다. 보이는 것은 10% 뿐이다. 수면 위에 보이는 빙산의 모습과 수면아래 있는 빙산의 모습은 그림에서 보듯이 많이 다르다.
결론만 먼저 얘기하면 참여정부와 범진보의 동반몰락 원인도, MB정부와 범보수의 ‘롤러코스트’식 지지율도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의 빙산 전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순과 부조리의 빙산
한국의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거칠게 도식화하면 과잉시장, 과소시장, 이권/무능 국가(기형적 민주주의)로 집약할 수 있다. 과잉시장은 세계사적 시간대가 강하게 작동하는 세계적 보편성이며, 과소시장 및 이권/무능 국가는 한국사적 시간대가 강하게 작동하는 한국적 특수성이다. (해방 이후 1987년까지 근 30년 동안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가장 결정적인 한국적 특수성은 분단/반공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은 선진국에 유행하는 경제사회 정책을 전향적으로 수용/순응할 것도 있지만, 우리의 내적 필요성에 따라 역행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국이 자유화, 규제완화가 대세라 해서 한국도 그것을 쫓아야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반대로 선진국이 규제, 감독을 강화한다고 해서 한국이 그것을 쫓아야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우리의 처지, 조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 이 3자가 이종 교배하여 시장을 왜곡시키고, 자주 혹독한 시장 실패를 가져왔고, 거대한 불로소득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시장이 유달리 혹독하고, 또 불의하게 느껴지는 것은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 특유의 거대한 과소시장의 존재와 주로 보수 이익집단에 의한 규제, 감독의 왜곡 때문이다. 과소시장은 곧 시장 원리, 즉 소비자 선택권과 심판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쟁의 무풍지대’, ‘독과점 시장’, ‘마피아 세계’를 말한다. 한마디로 ‘건전한 상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의미한다. 공공부문, 노블레스(청소년이 선망하는 직업군)들의 직업 세계, 재벌. 대기업 중심의 먹이사슬, 조직노동, 재정 할당 관련 먹이사슬(특히 토건 부문), 부동산 시장 등이 그런 곳이다.
한국은 전 세계 문명국의 공통인 세계화, 자유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부상 등으로부터 오는 변화, 부침, 경쟁의 압력이 너무나 불공평하게 분담된다. 과소시장 영역, 힘 있는 존재들이 너무 적게 분담하므로 서 나머지가 너무 많이 분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수이익 집단의 농간에 의해 시장 실패가 자주 발생하고, 복지가 전반적으로 취약하다. 이는 시장, 개방,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과 신자유주의 시비의 원천이다. 자유, 자율, 시장의 이름으로 자주 (소비자, 중소기업, 근로소득에 대한) 약탈을 자행해 온 보수 이익집단의 행태는 이 반감의 불에 붓는 기름일 것이다. 반면에 거대한 과소시장과 (취약할 지라도)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복지는 좌파 시비의 원천이다. 물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과소시장을 무슨 공공성의 발현인양 여기며, 불합리한 기득권을 유럽 사민주의를 빌어 정당화하는 진보 이익집단의 행태 일 것이다.
국가(민주주의)의 문제
한국의 시장과 국가(민주주의)를 규율하는 질서, 즉 헌법, 선거법에서부터 수많은 하위 법률, 명령, 조례, 시행령에 이르는 질서들은 애초부터 사회적 강자나 이익집단의 농간이 짙게 배여 있는 합법화, 제도화된 불의가 적지 않다. 또한 한 때는 정당하고 유효했지만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도 적지 않다. 물론 사회적 강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법, 제도를 무시하는 경우(불법, 탈법, 편법 행태)도 많다.
요컨대 불법, 탈법, 편법이 수면 위에 올라온 빙산이라면, 합법화, 제도화된 불의나 시대적 소명을 다한 법, 제도는 수면 아래 있는 빙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주의가 수면 위의 빙산이라면, 권력에 의해 너무 많은 자원(재정, 자리, 규제, 처벌권 등)이 전근대적 연고를 쫓아서 분배되는 현실은 수면 아래 빙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의 작폐가 수면위의 빙산이라면, 다양한 층위의 하위 권력(사회적 강자)들이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몰염치하게 추구하는 문화, 관행은 수면 아래 빙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중동의 편파, 왜곡 보도와 진보이익집단의 집단이기주의가 수면 위의 빙산이라면, 찰나의 이익을 위해 가치생산 생태계를 파괴하는 화전민 충동과 기여, 부담에 비해 훨씬 많은 권리, 이익을 누리려는 도적떼 충동이 횡행하는 현실은 수면 아래 빙산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의 성과, 한계, 오류
노무현은 원칙과 상식의 회복, 반칙과 특권 타파,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열망으로부터 가장 많은 에너지를 받아 집권에 성공하였다. 당연히 참여정부 초기에는 불법, 탈법, 편법의 청산에 많은 정치적 자원을 할당하였다. 이 목표는 사회적 불신 풍조 청산, 도덕적 신뢰 형성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불법, 탈법, 편법의 중심에는 법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있다고 보았다. 노무현은 당과 정부 등 수많은 하위 권력 기관의 창의와 열정을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독점욕이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제왕적 권력의 원천인 사정기관과 정보기관 그리고 여당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였다. 그 백미는 검찰 권력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그로인해 대선자금 수사에서 사실상 역차별을 당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노무현은 ‘검사와의 대화’, 거침없이 솔직, 담백한 서민적 언어 구사,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한 소송 등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풍모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진국 대통령처럼 자신이 법아래 있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권력 행사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였다. 가히 법과 상식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문화혁명을 하려는 듯이 행동하였다.
참여정부는 과잉시장, 취약한 복지, 지역 간 균형발전, 부동산 불로소득 문제 등과 관련해서는 범진보 세력 전체가 일찍부터 널리 공유하는 문제의식이었기에 흔들림 없이 복지예산 증액, 복지 제도 정비, 행정수도 이전, 공공기관 지방이전, 혁신도시 추진, 부동산 투기 억제 조치 등을 실행하였다. 과소시장 문제에 대해서는 초기 사민주의에 경도된 참모들에 의해 문제의식이 다소 늦게 형성되었음인지, 공공부문에 대한 하드웨어적 개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공부문 개혁에 관한 한 구조 개혁이 아닌 소꿉장난 개혁에 머물도록 하는 주요한 동인이었을 것이다. 집권 후반기에는 과소 시장 영역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도 있는 한미FTA 추진에 나섰는데, 협상 과정에서 노블레스들이 가지고 있는 반시장적 자릿세(경제적 지대)는 별로 건드리지 못하였다. 또 미국도 교육, 의료, 법률 등에 대해서는 개방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합법화, 제도화된 불의(유효성을 다한 법, 제도 포함)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뒤늦은 원포인트 개헌 시도로, 선거제도 개편을 염두에 둔 대연정 시도로, 검찰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 마련 시도(공수처 설립) 등으로 나타났다. 국가의 중장기적 비전, 전략의 필요성은 ‘비전2030’으로 나타났다.
참여정부가 엄청난 정치적 자원을 투입한 과제, 즉 반칙과 특권이든, 지역주의든, 두터운 불신 풍조든, 후진적인 사고방식(문화 현상)이든 대통령이 법과 상식의 자리에 복귀한다고 해서, 획기적으로 개선될 정도로 그 뿌리가 얕지 않았다. 단적으로 검찰은 분단, 내전(좌익 척결), 전쟁, 개발독재의 유산으로 인해 애초부터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면 민주적 통제가 불가능한 독점 권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의 이름아래 대통령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견제 장치가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버렸다. 법원도 검찰과 마찬가지로 사법고시를 통과한 엘리트가 독점하고, 한술 더 떠서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지렛대로 강력한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요컨대 사법 권력은 정치적 중립을 넘어, 대통령에 의한 통제를 넘어, 선진국에서 이뤄지는 민주적 통제(권력 분산, 견제)가 요구되었지만, 문제의식이 너무 늦게 형성되어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반(비)민주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바로 10여 년 전으로 회귀하다시피 하였다.
제왕적 민주 권력은 골목골목의 깡패들과 마피아들을 소탕하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제도적으로 청산해야 할 권력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후가 잘못되고, 제도를 건드리지 않으므로 서 민주적 제왕의 위세에 눌려 잠깐 숨어들었던 깡패와 마피아들이 그들과 죽이 정말 잘 맞는 정부를 맞아서 더 나쁘게 변해서 활개를 치게 된 격이다.
대중의 요구, 불만의 빙산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 판매하는 산업계에서는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지를 안다. 고객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불완전하며, 과도하거나 상호 모순적이며, 스스로도 자신의 핵심적인 요구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도 많으며,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산업계의 상식이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위한 공학(requirement engineering)과 공학기법(quality function depolyment 등)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요구, 기대, 불만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기본적으로 너무 적다. 참여정부의 역사적 사명을 ‘민주주의의 제도적, 문화적 완성’으로 국한하는 해석이나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압승을 ‘경제성장에 대한 묻지마 열망’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천의 얼굴을 가진 대중의 요구에 대한 표피적인 인식의 전형이다.
2006년 11월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이 극히 저조한 당 지지도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주력했어야 할 초점은 우리를 만들어 준 시대적, 계층적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지금 봐도 바른 통찰이다. 하지만 정동영은 2007년 내내 노무현과 ‘차별화 쇼’, ‘대통합 쇼’나 벌이고, 대선 시기에는 ‘차별없는 성장, 가족행복 시대’라는 별로 호소력 없는 구호를 내 걸었다. 이것을 보면 대중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우선순위를 정확히 매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정치권도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 표적 집단 심층면접, 장기간에 걸친 정기적인 여론 조사 등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조사 기관이 한국 사회의 속살이나 단면을 보여주는 경제사회 통계(현실) 천착에 게으르다 보니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누락 항목이 1987년의 그늘과 관련된 항목이다. 여기에는 과소시장(경쟁), 과도시장(경쟁),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대표되는 불공평성의 문제가 있다. 또한 기강과 질서의 지나친 훼손, 정치사회적 추진력(Driving Force)의 약화,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의 피폐 등이 있다. 사실 통계로 보나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증언)으로 보나 전두환 시절은 이들의 황금기였다. 당연히 보수는 1987년의 그늘=민주화의 그늘을 주로 문제 삼았지만, 진보는 대부분 1997년의 그늘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 지금도 진보 쪽의 경제사회 분석은 거의 1997년에서 시작되고, 논리적 연쇄 고리는 대충 양극화 심화-복지강화(보편적 복지)-차별 없는 성장으로 연결된다. 진보가 한국 사회 문제를 도출할 때 즐겨 사용하는 프레임인 양극화는 격차 그 자체를 문제 삼지만(그래서 별로 해법이 없다), 공평의 눈으로 보면 합리적인 격차와 불합리한 격차가 구분된다. 한편 한국의 원청-하청 관계를 포함한 다양한 층위의 갑-을 관계는 극심한 불공정 시비를 낳지만, 대체로 진보에 의해서도 보수에 의해서도 별로 이슈화 되지 못하였다. 대중들은 ‘결과’에 대한 열망도 강하지만, 동시에 원칙, 상식, 의리(조폭적 의리라도)를 지키는 의연한 자세에서 풍겨 나오는 정치적 매력도 중시한다. 하지만 대통합 쇼에 참가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정치적 매력 이라는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과 얄팍하기 짝이 없는 차별화 쇼는 이 같은 맹점의 산물 일 것이다.
2007년 당시 대중의 요구, 기대, 불만의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가장 적확하게 포착했고, 그 다음이 노무현, 문국현이고, 그 다음이 정동영, 권영길이 아닐까 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몇 번이나 찍어 먹어 보고는 모르는 사람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집권(출범)초기까지 모순, 부조리라는 빙산의 수면 위만 보았다.
대중의 요구, 불만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대통령 권한만 행사(제왕적 대통령제 청산), 분권과 자율(사정기관,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화, 공무원 혁신에 대한 강조), 불법적 정치행태 혁파(정경유착 폐절=대선자금 수사), 시스템에 의한 통치(당정분리와 공식적인 당정협의),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과 국가기관의 도덕적 신뢰에 대한 집착(청와대 정무기능의 왜소화, 청와대 권능 자체의 축소, 과거사 청산), 마키아벨리즘 기피, 일종의 문화/관행 혁명 시도 등이 그런 인식의 소산이다. 대통령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들이 다 따를 것이라는 유교를 통해 면면히 내려오는 착각도 여기에 일조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노무현은 집권 중후반이 되면서 빙산 전체를 대충 보았고, 대중의 변화하는 요구, 불만도 눈치 챘다고 보인다. 양극화 대책, 동반성장론, 비전2030, 개헌, 대연정(선거제도 개혁), 한미FTA, ‘유연한 진보론’ 등이 그 징표이다. 참여정부가 ‘좌파신자유주의’정부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은데 서 보듯이 한국의 과소시장과 과잉시장의 상호 의존 구조도 바로 보았고, 전략적 방향 감각도 대충 잘 잡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정교하게 정책화하고 실현할 정책 역량과 정치(정무) 역량이 태부족이었다. 참여정부 집권 기간에 노무현은 지적, 이념적으로는 엄청나게 진화,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처음부터 진보적 자유주의(?)로 머리가 정리되어 있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더십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진화, 발전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념적, 정책적 전환이 너무 거칠었다. 노무현과 청와대의 취약한 정무 능력도 거친 전환의 후유증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정말 노무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정무를 가장 경시 내지 무시한 대통령으로 기록 될 것이라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는 뒤집어 보면 노무현이 도덕성과 진정성을 가장 중시하고 자부하는 대통령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은 사심없이 열심히 노력한 것을 기반으로 ‘내가 그렇게 잘못한 것이 뭐냐’는 식으로 당당히 나서는 통에 사소한 잘못이나 정책 실패도 엄청나게 부각되었다.
인간은 원래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애써 강조하지 않는 아주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임을 강조하는 약간 나쁜 사람에게 훨씬 분개한다. 위선자니까! 이는 노랑바탕에 그려진 검은색 도로 표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와 같다. 게다가 참여정부의 국정 성과는 비교대상이 비교적 고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의 전임 정부들이기이에 신통찮게 보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참여정부는 위선과 무능의 매를 한꺼번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노무현에 비판적인 진보개혁 세력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참여정부의 성과도 적지 않지만 커다란 헛발질도 부지기수였다. 엉뚱한 사람 중용하고, 엉뚱한데서 변죽을 올렸다.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소리없이 세상을 바꾸는 사업(급소)을 놓쳐버린 경우도 많았다. 참여정부는 미국의 지미카터 정부와 비슷하게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도덕성을 유달리 강조했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많이 썼고,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해보려고 했으나 뚜렷하게 이뤄놓은 것이 없는 정부로...... 이명박 정부는 총체적 역주행 정부로 인식되지나 않을까 한다. 예컨대 참여정부는 관료에 휘둘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관료가 가진 잠재력 하나는 많이 끌어냈다. 하지만 이명박은 그들을 리더할 능력은 없으면서, 휘어잡으려고만 하다가 관료가 가진 적지 않은 자발성, 창의성조차 억눌러 버렸다. 단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그 많은 장관 중에서 강만수, 유인촌, 이영희 외에 대중이 기억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자기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하니......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쉼 없이 까대는 자칭 진보개혁세력이다. 이들은 아직도 한국 특유의 모순과 부조리의 빙산 전체를 제대로 본다는 징후가 없다. 단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빼 버리면 논지 구성이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좌파적 개혁의 필요성만 보는 외눈박이들, 오른쪽 반신(우파적 개혁)이 마비된 중풍환자들이 너무 많다. 비전2030, 개헌, ‘유연한 진보’가 나온 문제의식을 이해 못하는 사람도 너무 많다. 2004년 총선 압승이후 몇 년 간에 걸쳐 보여준 졸렬하고도, 무능한 일련의 정치 행위에 대한 반성 없이 대중의 천박한 욕망 타령이나 늘어놓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찌 보면 참여정부는 똥인지 된장인지 한번 찍어 먹어보고 비로소 알았는데, 적지 않은 자칭 진보개혁 세력은 그것을 몇 번이나 찍어 먹어보고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MB와 한나라당이 참여정부로부터 배운 것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열화와 같은 요구는 노무현과 범진보 세력의 성과는 유지, 발전시키고, 한계는 뛰어넘고, 오류는 시정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임 정부들을 ‘좌파정부’로 규정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ABR(Anything But Roh)노선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 구조상 절실한 복지확대 정책, 투기 방지 정책, 공정거래 정책 등을 경시, 부정하게 되어있다. 왼쪽 반신이 마비된 중풍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사회적 강자 집단의 반칙, 특권에 대한 응징, 변칙. 편법 근절, 민주적 절차 준수, 정경유착 폐절, 지역 간 균형발전 등 진보와 보수 이전의 기본 가치들도 경시, 부정하게 되어있다.
MB와 한나라당이 참여정부의 좌절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지지층에게 물질적 이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부동산 규제를 풀면서, 2%를 위한 정부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강남에 대한 물질적 이익 주기를 계속하려는 것은 이런 깨달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의 눈, 귀를 가리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셋째, 대통령은 말 수를 줄이고, 정제된 표현만 하고, 애매모호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왕의 언어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제왕적 권력과 권모술수 조삼모사 등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스스로가 변칙, 편법, 심지어 반칙까지 몸에 잘 배여 있으니 배우지 않아도 누구보다도 깊이 체득하고 있을 것이다. 다섯째, 당을 확고히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 세력을 무력화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MB는 참여정부의 좌절로부터 정말로 배워야할 것은 배우지 못하였다. 한국 사회는 천의 얼굴을 가진 역동적 사회라는 것, 좌파적 개혁과 우파적 개혁이 둘 다 절실하다는 것, 이론과 실물, 전문과 전문의 벽이 높아 지식사회가 현실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것, 정치가 구조적으로 무능할 수 밖에 없다는 것, 한국 사회가 집권 세력의 도살장이라는 것,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는 것 등.
정부와 여당의 도살장
21세기를 전후한 한국사회는 1961년, 1987년, 1997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질서의 모순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기이다. 따라서 정치권력 주도의 획기적이고 대담하고 정교한 대수술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 대수술의 목표는 사실 한강의 기적을 연출한 박정희 모델 이후의 새로운 경제사회 모델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대수술을 행할 실력 있는 의료팀은 불행하게도 보수에도 진보에도 없다. 리더십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정당을 무능하게 만드는 구조(법과 제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엄청난 수압이 걸린 작은 호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압의 근원은 절절한 일자리 열망, 불공정과 불공평에 대한 불만, 높은 교육수준이 낳은 높은 기대수준과 비판의식, 4.19, 광주항쟁, 유월항쟁, 촛불시위 등을 연출한 높은 행동성 등이다. 호스는 곧 구조적으로 무능하고 이익집단에 휘둘리는 공공(정치, 관료, 언론)과 지식사회이다. 이 수압을 단기간에 쉽게 낮출 수 없고, 호스 역시 크게 늘릴 수 없기에 격렬한 좌우상하 요동은 필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정말 정부와 여당의 도살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 박정희 이후 역대 정부들이 바보 라서 집권 말기에 험한 꼴을 당한 것이 아니다.
참여정부는 이 구조적 무능과 부여된 난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광복이후 60년의 작폐를 일거에 정리하여, 정치적 신기원을 이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임 정부들과 차별화 하려고 하면 할수록, 획기적인 무언가를 과감하게 하면 할수록 무능, 교만, 독선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이는 이명박 정부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MB정부는 더 나쁘게도 이권 추구에 너무나 능한 보수세력을 딛고 서 있다. 참여정부는 과소시장을 무슨 공공성인양 착각하는 이념 세력이 약간 떠받치고 있었지만, 집권 중기쯤에는 이들은 배제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참여정부와 진보개혁 세력이 유능해 진 것은 아니다. 사실 진보는 앞으로도 한국 사회 깊은 속살이나 복잡 미묘한 작동 원리를 몰라서, 다시 말해 개혁의 급소를 몰라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를 대상으로 입찰을 하거나, 법, 제도, 시행령을 바꾸어서 재정을 크게 털어먹어 본 적도 없고, 돈도 크게 벌어 본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정수인 ‘기업’을 해 본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가 거대하고 복잡한 한국 사회를 감히 획기적으로 개혁을 하겠다고 나서는 존재가 맞다면, 국가경영에 대한 개인적, 조직적 학습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소통은 필수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도덕성, 진정성, 전투성,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스크럼, 돌멩이 등으로 사회를 바꾸던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났기 때문이다. 정말 스스로 진보 정치인 임을 자처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국가경영을 연구 고민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정치를 당장 그만두는 것이 진보개혁에 최대로 기여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는 참여정부가 보여주었듯이 지혜롭지 않으면 좋은 의도를 나쁜 결과로 갚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는 처지와 조건 상 한국 사회의 깊은 속살을 잘 알게 되어있다. 재정과 자리를 해먹는데 능하다. 법, 제도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그것도 은밀하게 고치는데 능하다. 한마디로 유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적 탐욕 충족에 유능할 뿐이다.
어쨌든 MB정부는 유능하고 몰염치한 이권세력이 본체내지 주류 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는 (이권이 아닌 이념을 쫓고, 현실을 모르다보니)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이권을 쫓다보니) 부패로 망한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빈말이 아니다. 권력이 무슨 비즈니스 모델인 듯 자리, 재정 약탈에 여념이 없을 먹튀 이권 세력을 철저히 경계하지 않는 한 MB 정부는 그 누구보다도 일찍 험한 꼴을 당하는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말로 절망스러운 것은 저 형편없는 보수세력을 외면한 민심을 끌어 모으지 못할 정도로 더 형편없는 우리 진보개혁 세력이다. 헛발질 심하게 하고 좌절한 노무현보다도 훨씬 못한 우리 진보개혁 세력이다. 노무현을 껑충 뛰어넘어도 될까 말까인데, 노무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자칭 진보개혁세력이다. 김대호(사회디자인 연구소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