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마르크스의 M-C-M과 자본이라는 물신
틈나는 대로 마르크스의 [자본] 1을 읽고 있다. 아주 느리게 읽고 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읽다 보면 어떤 문제가 떠오르고 그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독서를 계속할 수 없이 마음이 번잡해지고 만다. 책을 읽다가 의자에서 문득 일어나서 서성인다. 이렇게 서성이는 시간에 거장의 사유가 핏줄을 따라 도는 것을 느낀다.
[자본]1의 제1편을 읽은 후에 이달의 책으로 선정된 제8편을 읽고는 이제 다시 제2편을 읽고 있다. 제 2편에서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공식인 C-M-C와 M-C-M과 만난다. 나는 문득 M-C-M에 목숨을 거는 자본주의의 주체들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C-M-C는 이해하기 쉽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많은 데 이 공식은 이를 충족하는 한 가지 방식일 따름이다. 자급자족이나 물물교환과 별반 차이가 없다. 먹고 사는 것의 자본주의적 방식. 돈은 ‘구매력’이라는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돈을 번다. 이 돈은 노동자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된다. 이 방식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근대에 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삶과 사용가치(use-value)와 긴밀히 엮여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도착(perversion)은 M-C-M으로 표현된다. 이는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정확하게는 M-C-M’이다. M’=M+잉여가치. 자본은 순환을 통해 불어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의 증식은 폭력을 수반한 착취로 가능하다. M-C-M의 공식에서 C는 상품인 노동이다. 상품의 가치는 결국 노동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일정한 자본(M)으로 노동자를 고용하여 상품을 생산하게 하고(C) 이를 팔아서 더 큰 자본(M)을 마련한다. 이 거래를 통해 자본이 증식되는 것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의 가치가 임금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치 = 노동 가치= 임금+잉여가치. 따라서 자본가 또는 자본가 집단이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 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노동력의 확보는 인류 역사에 유래를 발견하기 힘든 세계적 규모의 폭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가 주장하듯이 금욕적이고 윤리적 자본가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빵 한덩어리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팔아야 하는 자유인의 껍질을 쓴 새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유럽 밖에 있는 세계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과 병행하였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당대 유럽 교양인들을 분노에 떨게 했지만 지금은 세계 교양인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래도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나온 후에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혼신을 다했다. 이와 더불어 자본의 증식이 결국에 있어서는 전체 대중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선전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가가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경영을 혁신화함으로써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또는 노사가 함께 허리띠를 졸라 매어 성장(=자본의 증식과 집중)하면 궁극에 있어서는 전체 사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자본주의 순환의 결과로 형성된 거대한 자본을 자본가는 사회에 환원한다고 속삭인다.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성실히 일함으로써 누구가 자본가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컨대 자본가는 일반 대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정치경제학’의 최신판이다. ‘중도’ 보수의 신문을 펼치면 어디서나 한국판 ‘정치경제학’을 발견한다.
한국에서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미국과 일본의 자본 축적을 위한 ‘공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신식민지…) 마르크스가 ‘시초축적’에서 다룬 모든 착취의 형태들이 나타났다. 노조 금지, 노동시간의 연장, 아동 노동의 착취, 임금 상승의 제한, 철야 노동의 도입, 자본가에 대한 법적 지원과 경제적 특혜 등등.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개발이었다. 한국의 정치경제학자들이 혼신을 다한 덕분에 민중의 피와 땀을 극단적으로 착취한 인간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부활하고 있다. (더 잘 살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고 자본은 속살거린다.)
그러면 마르크스가 제시하고 있는 해결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너무나도 낙관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본의 증식과 집중을 통해 극단적인 계급의 양극화를 낳는다. 자본가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노동자의 수는 날이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자본가는 동료의 피까지 빨아먹는 흡혈귀임에 비해 노동자는 사람의 형태를 지키지 힘든 지경이 되어도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 노동자의 수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노동자의 임금은 날이 갈수록 감소한다.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노동자가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한 명의 자본가가 백만명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백만명의 노동자들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극빈자 수준이고 자본가는… 따라서 혁명은 불가피하다. 일 대 백만의 싸움에서 폭력은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하여 정신분석학의 시각에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본다. 우연히 구입한 잡지에는 라캉의 <Desire and the Intepretation of Desire in Hamlet>이라는 논문이 영역되어 실려 있다. 이 논문은 라캉이 1959년 4월 29일에 가진 세미나를 번역한 것이라 한다. 이 논문에서 읽은 한 대목이 나에게 M-C-M을 해석하는 단서를 준다.
신과 신자의 관계와 수전노와 돈의 관계를 언급한 후에 라캉은 말한다. “This is the culmination of the fetish character of the object of human desire. Indeed all objects of the human world have this character, from one angle at least.” 돈은 인간 욕망의 대상에 연루된 물신이 됨으로써 자본이 된다. 이제 돈은 과거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알튀세르의 호명(interprolation)은 정신분석학을 이용하여 자본과 주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은 물신으로 등극하면서 이제 주체에게 진정한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은 단순히 사용가치를 구입하기 위한 도구하는 역할을 초월하여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된다. 유물론에 근거한 신학의 세계가 열린다. 자본주의의 주체들은 자본만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지젝의 종교 분석은 그대로 자본 분석에도 통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는다. 신은 이미 해체되었다. (그런가?) 그 다음에 해체할 것은 물신(物神)이 된다. 이 물신은 원래 사람과 사람의 경제적 관계를 위한 수단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독립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주체의 욕망은 물신과의 관계에 놓인다. 자본이 주체에게 물신이 되면 이를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자본의 증식과 집중은 단순히 경제적 논리의 필연성을 넘어서서 작용한다. 자본을 넘어서서 매개되는 관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물신은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지배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이 자본의 부재로 하여 처참하다고 인식하는 순간에 노동자의 궁극 목표는 자본가가 된다. 물신정(物神-政)정치에서 자본가는 성직자들이 되고 노동자들은 평신도들의 자리에서 물신의 은총을 빌면서 산다. 노동자들은 무엇 때문에 자본이라는 구원의 샘에 도달할 수 없는가를 고민한다. 자연스럽게 집단의 힘에 의해서 자본가들을 타도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일은 소련에서 일어났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전복을 이끄는 것은 동일한 물신이다. 가령 노동운동이 현존하고 있는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분배적 정의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하자. 누가 더 막대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가? 이는 곧 물신의 은총을 누가 더 많이 받는가를 따지는 것과 동일하다. 다시 말하면 유물론은 모든 사람들이 물신 앞에 평등한 것을 지향하는 사회가 된다. 공산주의는 물신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인데 물신을 기초로 하여 주인과 노예의 위치만 바꾼다.
(내 생각에) 마르크스는 물신 앞에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더 이상 물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었다. 이 사회는 칸트적 의미에서 보편주의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가 생각한 계급없는 사회는 오직 자본의 논리를 초월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인간이 오랫동안 신을 상정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듯이 물신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일도 거의 불가능하다. 물신 앞에 평등하리라. 자본을 평등하게 나눠 먹는 방식으로는 물신을 숭배하는 삶의 관계를 극복할 수 없으며 결국에 있어서는 여전히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 살게 된다.
마오쩌뚱이 문화혁명을 단행하면서 고민한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를 생각해 본다. (마오쩌뚱이 이 시기에 마침내 돌아서 폴 포트처럼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마오쩌뚱에게 중국은 두 가지 미래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스탈린식 공산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현재 중국이 가고 있는 기형적 자본주의였다. 이 두 가지만이 가능한 미래라고 했을 때 마오쩌뚱이 젊음을 바쳐 혁명을 한 보람이 어디에 있었을까? 그래서 마오쩌뚱은 하나의 실험을 감행하였다. 어쩌면 그는 사람들을 너무 심하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손 도손 살 수 있으면 부귀영화를 헌신짝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중국을 보면 이 실험은 처참한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자본주의화는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동안) 마오쩌뚱이 꿈꾼 미래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에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사회구조의 변화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런 성격(인격)을 갖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는 자본의 요구를 거부하는 – 또는 물신을 파괴하는- 인간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앨 고어의 업적은 온실효과에 따른 재앙을 환기하는 운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온실효과에 따른 재앙이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가장 급진적인 방법은 미래의 세대를 위해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입장과 동일한 것이다.) 이 요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누리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존재인 경우에 현실적이다.
이 상황에서 정치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만능의) 대안은 ‘파이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들의 식욕을 줄이는 대신에 먹을 것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온실 효과를 해결하는 방법도 이산화탄소 등을 배출량을 제한하여 소박한 삶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데 따른 부담금을 지불하거나 대안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가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풍요로운 삶을 약속한다. 물신의 젖과 꿀이 넘치는 미래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물신은 이 위기를 돌파할 놀라운 기술 혁신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희망을 안고 죽었지만 마오쩌뚱은 절망을 안고 죽었을 것만 같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처럼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물신 숭배는 신 숭배와 마찬가지로 매우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신을 만들어 숭배해야 안심하는 인간들로 우리가 살아가는 한에서 있어서 우리는 후기-자본주의에서 후후기-자본주의로 진화하는 물신의 지배를 받고 살 것이다.
헤겔의 신(神)이 정명제(thesis)였다면 마르크스의 물신은 반명제(antithesis)가 된다. 그러면 합명제(synthesis)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 경우에 부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물신의 부정이다. 이는 곧 자본이 인간 삶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확립하는 것이다. 이를 칸트의 정언명법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사회의 실현을 통해서만 물신은 극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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