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전의 난곡)
간단한 숫자 계산을 해보자. 난곡 재개발로 개발 전 보다 주택 수가 33% 증가했고, 세대 당 평균 주거 면적은 대략 50% 정도 증가했을 것이다. 신규 공급 아파트는 중소형 평형대(23~44평)로, 대체로 도시 근로자나 영세 자영업자 층이 실입주자가 될 것임을 말해준다. 기사는 이걸 가지고 "도시 겉면"이 화려해지는 것일 뿐이며, "없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3,300여 세대의 중소 평형 아파트단지가 단지 과시용 포장일 뿐인가?
(김기찬 作)
이 글의 기사 (달동네가 사라진다고 가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는 개발 전의 난곡을 김기찬의 골목 사진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추억과 낭만의 감성으로만 이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동네는 주거 환경이 나빴어도 살기 좋았어요. 일 나갈 때 이웃 사람한테 아이 좀 봐 달라고 부탁하면 애들 밥 주고 씻겨서 재워놔요. 그러면 나도 콩나물 사서 무쳐서 같이 나눠 먹어요. 그 집에서 된장국 끓이고, 난 콩나물 무치니 반찬도 두 배가 되어 좋고. 이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면 동네 무너진 담장을 고치든지, 화장실을 짓든지, 부서진 길을 내 주는 게 옳지 않느냐"라는 말을 아무런 유보나 해설 없이 인용한다. 마치 그들이 300~500만원짜리 전세집에서 지난 40여년간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는듯이.
난곡 재개발의 "이면"을 다루는 여러 기사에서 인용되는 "배제된"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자립할 수 있는 노동 능력이나 노동 기회를 갖지 못한 보호 대상자들 또는 그에 준하는 계층이다. 재개발 전이건 후건 그들을 대표하는 정서는 헤어날 수 없는 가난에 내몰린 희망 없는 암울함과 무기력함이다.(그래서 도시 빈민 문제는 노동 문제보다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훨씬 어렵다.)
도대체 절대빈곤층의 문제를 이런 식("차라리 옛날이 좋았어요...")으로 다루는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들의 문제는 자본주의적인 빈곤의 악순환이라든지 중산층의 해체라든지 양극화라든지 하는 것과는 그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삶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직접 결부되는 절대적이고 극한적인 문제이다.(옛날엔 살기 좋았다고? 거기에 무슨 건강한 공동체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착각일 뿐이다.)
실거주자의 문제를 모든 것에 우선시하는 기사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가옥 주(권리자)의 재 입주율이 8.8%에 불과하다는 통계(이게 우리나라 재개발의 주요한 문제다) 보다는 실거주자 중 권리자의 약 50%, 세입자의 약 35%가 신규 공급 아파트에 입주했다는 겉보기 통계에 더 눈길이 간다.(이건 꽤 좋은 숫자 아닌가?) 기사 서두에서도 권리자 입주율을 제시하지만, 막상 기자는 그게 왜 문제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기사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대로만 보면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재개발을 하지 않든지 더 질 낮은 주택을 공급했어야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월 17만 원정도 하는 임대료를 누가 어떻게 보전해 줄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기사의 자료에 의해 대충 계산해 보면 연 20억 원정도 든다.) 그런 식의 문제의식이면, 비판적 태도가 필요한 게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사회복지사의 증원이 필요하다.
근데, 아무리 소외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절대빈곤층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삶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결식아동 문제가 허접한 무료 급식 제공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결식아동이 무료 급식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차라리 주류 언론의 훈련된 기자들이 쓰는 르포 기사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더 잘 지적하고 있다. 난곡에서 첫 시도된 "순환정비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왜? 임대료가 너무 높아서? 문제의 징후는 실거주자의 50%나 세입자의 35%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리자의 8.8%에 있는 것이고, 그 문제가 세입자 문제를 포함한 모든 "악"(?)의 근원이다.(노태우 정권이 이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 가장 근접한 정책을 시행했었고, 엄청난 "사회적" 반발에 직면했었다.)
스크랩된 기사의 기자는 사람들이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선 것만 보고 "달동네가 사라지면 가난도 사라진다."는 착각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허수아비 독자를 상대로 "계몽"하려 드는 오만이고 객기다.(초등학교 3학년짜리 딸도 수학을 전공한 아빠에게, 학교에서 막 배워 온 "신기한" 수학을 가르치려 든다. - 이건 귀엽다.)
이 기사는 지역 공동체에 의한, 그들을 위한 개발을 희망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적 무기력에 직면해서 "도와줄 거 아니면 건들지나 마라"는 정서에 매몰되어 있다.(그건 실제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 정서는 포기와 무기력 또는, 극도의 분노와 이기심에 기초한 영웅 추수적 파시즘의 토양이 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 사회는 찻잔속의 파시즘을 꽤 자주 경험하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문제를 재 정의하는 것이 철학자가 할 일이라고 한다. 그게 이런 섣부른 연민과 위장된 무력감을 재인용하고 전파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그리고 숫자가 적어도 인문학의 적은 아닐 것이다.)
"정말로 놀랄 만한 것은... 다수의 초기 (도시)계획운동의 비전들이 1890년대와 20세기 초에 왕성했던 무정부주의 운동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점이다. 무정부주의 개척자들의 이러한 비전은 단지 대안적인 건설 형태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아니고 관료 사회주의도 아닌 대안적인 사회, 즉 소규모 자치사회에서 노동하고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에 기반 한 사회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이상이 실현될 때 이는 종종 그들이 증오했던 국가 관료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처음 착상될 때 실제화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이들 사상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활동가, 그리고 이 세계의 행동가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얼마 안 있어 사상의 창조자들은 행동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을 포기했다." (피터 홀, <내일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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