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위르겐 하버마스

체 게바라 2006. 7. 16. 13:55

 

위르겐 하버마스의 생산 패러다임 비판과 비판사회이론의 새로운 정초



마르크스의 이론은 현실에서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동구권이 몰락했고 소련 역시 제3세계로 전락함으로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는 그 한계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반드시 쓸모 없는 사상인가 하는데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을 구성하는 주요 논제들이 바로 자본주의의 병폐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시작된 비판이론의 대부격이고 비판 사회이론가들 중에서 마르쿠제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근대적 개념인 도구적 이성을 버리고 합리적 이성으로 탈바꿈하여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푸코의 의견과 대립하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은 상당히 유명하다.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연물들을 변화시키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간단히 말해서 생산 패러다임은 인간의 노동과 물질적 생산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로부터 인간의 삶과 사회 및 역사의 기본적인 전제와 조건 및 결과, 나아가 기본적인 구성 원리와 규제 원리를 이끌어내려고 시도하는 이론적 틀이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노동 또는 목적 합리적 행위는 도구적 행위나 합리적 선택 또는 양자의 결합을 말한다. 도구적 행위는 경험적 지식에 근거한 기술적 규칙들을 지향한다. 합리적 선택의 행위는 분석적 지식에 기초한 전략들을 지향한다. 결국 목적 합리적 행위란 이러한 기술적 규칙들과 선택된 전략들을 사용하여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일정한 목적들을 실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의사소통적 행위는 상징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이다. 이 행위는 상호적인 태도 기대를 정의하고 최소한 두 행위주체들에 의해 이해되고 인정되어야 하는 의무적으로 타당한 규범들을 지향한다. 하버마스는 노동이라는 범주를 통해 의사소통 또는 상호작용이라는 범주를 통해 의사소통하는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구체화하고 있다. 하버마스에게 마르크스의 근본적 약점은 노동이라는 범주가 상징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의 영역을 도구적 행위의 영역으로부터 충분히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상호작용과 노동의 연관을 분명히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회적 실천이라는 특정화되지 못한 항목 아래 하나를 다른 하나로 즉 의사소통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했다. 마르크스에게도 규범적인 차원이 문제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단지 도구적 행위의 차원에서의 해방, 곧 자연에 대한 지배만으로 문제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관계적 차원, 자연적, 사회적 질곡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이 더 중요한 계기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과의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모순의 참된 해결이며 존재와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 개인과 유 사이의 갈등의 참된 해결이다. 공산주의는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이러한 해결책으로서 스스로를 안다. 마르크스의 노동개념 역시 마찬가지로 단순히 목적 합리적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노동의 본래적 모습에 비추어 자본주의 현실의 소외된 노동을 비판할 수 있었다. 그 개념은 또한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차원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버마스의 입장에서는 마르크스가 마땅히 구분해야만 할 노동과 상호작용 또는 도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간의 범주적 구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노동에만 결정적 무게중심을 두면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런 식의 문제 인식이 해방에 대한 기술주의적 이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르크스가 해방 사회의 이념, 곧 인간의 참된 도덕적 완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충분한 노동의 실현을 통해서 가능하고 또 노동의 실현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유의 왕국의 설립이라는 해방 기획의 과제를 유적 본질의 대상화의 발전, 다시 말해 자연 지배의 확대라는 차원과 같은 연속선상에 놓고 있다. 도구적 이성의 계속적인 성장이 어떻게 도덕적 실천적 이성의 해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역사를 어떻게 해서 자연사의 질적으로 변화하는 발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등,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사회적 합리화를 행위연관들의 도구적, 전략적 합리성의 성장과 동일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개념 속에 그것에 비추어 경험적으로 기술되는 합리와 과정을 평가하고 포괄적인 사회적 합리성을 모호한 형태로나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 합리성 개념을 생산력과 동일한 수준에서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 역시 규범적인 차원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하버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론 속에 규범적인 것의 차원을 끌어들인 것뿐이다. 자유의 왕국이니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결사니 하는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규범적 차원의 이념들이다. 그와 같은 이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삶을 소외라고 규정할 수 있었고 자본주의적 관계아래의 노동을 착취라고 규정할 수 있었다. 아무런 규범적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소외된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사람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착취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러한 규범적 기준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한 기준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규범적 차원이 지닌 독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때문에 그러한 기준을 제대로 정당화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의 사회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이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 마르크스의 의도는 유토피아적 이념 그 자체의 폐기라기보다는 해방사회가 자본주의사회자체의 동학과 위기의 논리속에 이미 어떻게 구조지워져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의 주-객관적인 조건들이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태내에서 성숙해 있으며, 공산주의는 한갖 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증법적 부정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 사회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상의 이념은 연합한 개인들과 자연간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이고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부르주아적 법, 도덕, 정치는,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적대적 표현인 한에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의 필요가 충족되고 개인들간의 갈등과 경쟁의 원인이 제거되었으므로 보편자와 특수자의 화해라는 헤겔적 문제는 쓸데없는 것이다. 자유의 왕국이라는 이념은 그가 그리고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제도적 객관화가 필요없다는 것, 다시 말해 보편자와 특수자 사이의 화해는 더 이상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의 복잡한 체계에 의해 매개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제도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생산과정에 대한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통제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결사라는 이념이 추상적 정신을 넘어서 현대의 산업화된 복잡 사회의 조건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가 그러한 추상적 이념을 동시에 탈자본주의 사회의 조직화 원리로서 이해하는 한 그는 일종의 범주 오류를 범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이념이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 매커니즘과 발전경향에 내재하는 역사적 전망임을 결코 보여주지 못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오늘날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그러한 이념이 농민적 수공업적 세계의 가족적, 이웃적 협업적 공동체로부터 나온 향수적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그 규범적 함축에 대해 나중에는 침묵하고 말았던 사회주의의 야누스적 면모는 산업노동이 지배하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상화된 과거를 지향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에게는 구체적인 사회주의 기획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있었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에 대한 집착이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성립과 함께 발전한 근대 사외의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평가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벌전의 의미를 오로지 생산력의 발전과 공산주의를 위한 물적 토대의 마련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때문에 그에게는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제외하고는 착취, 소외, 비인간화등으로 특징지워지는 근대 사회전체가 총체적인 부정의 대상이 되고, 자본주의 발전이 역사속으로 밀어내고 말았던 하나의 특수한 공동체적 삶의 양식의 복원에 초점을 맞추고 만다. 그는 근대 사회에 이룬 다른 역사적 성과를 무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공동체적 삶의 양식, 유대의 이념이 오늘날의 복잡한 산업사회의 조건에서 어떻게 구체회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어떤 분석도 제시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법치국가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면서 법치주의 이념 그 자체를 그리고 자연법의 토대로 사회학적으로 해체하면서 자연법의 의도 그 자체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영원히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때 이래로 자연법과 혁명의 연결고리는 풀어지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현실 분석과 해방 기획의 내적 결합이라는 자신의 역사적 성과를 드러낸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사회적노동이나 생산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전략적 패러다임의 선택이 감당할 수 없는 이론적 책무를 그 범주들에게 떠맡기고 말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사회현상은 경제구조에 대한 의존성의 한계 안에서만 자리매김된다. 그의 이론적 기획이 지닌 애초의 풍부함이 곧바로 생산 패러다임이라는 전략을 선택하자마자 곧바로 긴장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문제삼는 역설과 긴장이 바로 그 변증법 탓일지 모른다는 따라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경험한 대로 문제 해결에 대한 변증법의 약속이 바로 문제의 참된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변증법이란 경제와 다른 현상들의 관계를 본질, 형상의 관계 따위로만 파악하는 지독한 본질주의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버마스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의사소통행위와 그 밖의 행위들간의 행위론적 구분이다. 의사소통행위는 상호간의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행위유형이라는 점에서 목적 합리성의 차원에서 성공이나 목적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지향하는 다른 행위 유형들과 구분된다. 중요한 것은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가능한 모든 대화 상황에 나타나는 일반적 구조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때 드러나는 그러한 대화 상황에 필연적으로 전제되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전제들과 요소들이다. 이해 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은 불가피하게 당사자들간에 이해 가능성, 진리, 진실성, 올바름 등에 대한 타당성 주장들을 제기하고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해 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은 당사자들간의 상호주관적 상호성에 근거를 둔 동의를 끌어내야만 한다. 그 동의는 상대방이 제기하는 타당성 주장을 인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렇게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하는 어떠한 행위자도 그와 같은 보편적 타당성 주장들을 어떤식으로든 제기하진 않으면 안된다. 모든 타당성 주장이 항상 의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언어 행위는 암묵적으로라도 그러한 타당성 주장들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의사소통의 불일치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건 간에 그가 문제삼고 있는 보편적 타당성 주장들은 인간의 언어 구조 그 자체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해 도달을 지향하는 행위에서는 암묵적으로 언제나 이미 타당성 주장들이 제기된다. 이러한 보편적 주장들은 가능한 의사소통의 일반적 조건들 안에 들어있다. 의사소통 이론은 이러한 타당성 주장들 속에서 부드럽지만 완고한 비록 좀처럼 해결되지는 않지만 결코 침묵하지도 않는 이성에 대한 주장을 제기할 수 있는것이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합의적으로 행위가 이루어지는 그 어떤 곳에서건 그리고 그 언제든지간에 사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 비판의 핵심중의 하나는 마르크스가 규범적으로 구조 지워진 상호작용의 영역을 노동, 곧 도구적 행위의 영역으로 환원했다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범주적 혼동은 나아가 사실과 가치 ,규범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의 차원에 대한 혼동과 연결되어 있다. 하버마스는 여기서 사실과 가치의 전통적 이분법에 기초해서 마르크스가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의 차원과 가치의 차원을 혼동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 이상주의로 후퇴하든가 사회에 대한 경험적 접근 대신에 규범적 접근을 채택해야 하는가. 하버마스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는 규범적 차원이 우리의 언어구조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마르크스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내재적 비판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행위조정 매커니즘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바로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규범의 차원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언어구조에 내재하는 비판사회이론의 규범적 차원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실재 자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힘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규범적 차원이 확고하게 경험적차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어 구조에 내재하는 잠재적 합리성의 표현인 현대 산업사회의 민주적 제도, 정당성 원리 등에서 이미 구현되고 인정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그 분석의 대상과 공통의 규범적 근거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버마스가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의미론적 구분을 허물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론적인 관점에서 존재의 영역과 당위의 영역, 기술적인 언명과 평가적인 언명의 엄격한 구분 자체는 일단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가치평가뿐만 아니라 기술적 차원의 인식조차도 기술적 언명과 결합된 진리라는 타당성 주장을 통해 타당성 영역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된다. 문화는 가치들의 체계에 의해 사실들과 연결됨으로써만 형성된다. 이러한 대상의 가치 연관을 사회적 삶의 질서에 대한 기술적 파악과 그 질서 속에 구현된 이념들 및 가치들의 재구성을 결합함으로써 이용할 수 있다.

 

기술적 관점에서 분석되는 대상조차도 타당성의 측면들에서 고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타당성의 이념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의미론적 구분을 지키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치평가의 기준들이나 현존하는 규범들에 관한 기술적 언명들을, 규범들을 권장하고 표현하거나 옹호하는 언명들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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