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전자를 주장하는 결정론자와 후자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 간의 대립은 오늘날의 역사철학에 있어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인간은 운명의 흐름에 순응하는 피동적인 꼭두각시인가, 아니면 역사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인가?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라는 역사관을 따를 때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 안에서의 개인의 역할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신의 의지나 절대이성이 역사전개의 원동력이라면 역사 안에서 인간은 상당히 미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물론 개인은 존재한다. 특히 세계사적 의미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예를 들어 나폴레옹, 알렉산더, 시저와 같은 전쟁 영웅, 혁명가들은 역사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실천하려는 이성의 요구를 모범적으로 수행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헤겔은 그들 행동의 목적 속에
고차원적인 세계정신이 있는 것이지 그들이 이를 의식하거나 지향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세계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 뿐이다. 헤겔의
역사관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고유성을 요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역사의
심판을 전제로 한 역사관에서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의 창조행위를 찾긴 힘들다. 만약 신의
뜻이나 절대이성이 역사 전개의 원동력이라면 인간 개개인은 역사의 방관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결정론을 따른다면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인간은 신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 심판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자기 의지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을 따르는 피동적인 꼭두각시, 역사의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현재 나의 결정이 무슨 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역사가 정해진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면 개인은 그 과정의 하나인 현실에 굴복하고 동의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개인의 자유와 책임은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다. 즉, 역사적 결정론은 쉽게 보수주의와 체념주의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 헤겔은 주어진 현실에 관조적인 태도만을 취했으며 또 그현실을
이상화했다. 특히 역사의 발전과정을 역동적인 변증법적 과정으로 설명하기는 했지만, 절대정신의
완성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의 발전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현존하는 국가를 절대정신의
구현으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고, 이는 마르크스의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의지와 참여를 역사 진행과정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봉건제도가 자본주의로의
이전에 의해 평가되었듯이 자본주의는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평가받게 될 것이며 역사의 끝에
나타날 것은 추상적인 자유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실행될 구체적 자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자본주의자들에게 피해야 할 문제점들을 지적해 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고 조롱섞인 말투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실패는 목적론적 역사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는 말은 역사란 일종의 살아있는 윤리적 실체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믿음을 갖거나 형이상학적 목적론을 신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적 메시아 사상, 종말론, 최후의 심판, 천년왕국 등 직선적 발전사관과 연관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밖에 위치한 초월적 신의 뜻이 전개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심판을 의미한다.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볼 경우엔 '프로레타리아의 정의로운 승리로 역사가 심판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역사관은 모두 초월적 섭리가 존재한다는 종교적 기원을 가정한다.
그런데 이 경우 인간은 당연히 초월적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앞으로 전개될
모든 사건에 대해 판단을 삼가야 한다. 인간이 심오한 초월적 뜻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 선 학자들은 역사의 심판이란 역사에 일정한 목적이 있고 역사가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담고 있으므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계질서는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믿음을 따르기보다는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진보란 서구중심적 산업화와 지식, 이념의 팽창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를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들에 따르면 보는 시각을 바꾼다면 역사는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의미를 지닌다는 시실을 거부하고 진보논리 자체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관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으므로 무정부적인 혼돈을 야기할 수 있다.
어떤 시대이고 역사를 비판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울여야 할 것은 역사를 누가
어떻게 어디서 심판하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를 심판하는 것은 결국 인간, 특히 역사가인데 모든
역사를 통괄할 만큼 완벽하고 종합적인 시각을 지닌 역사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특정한 시대,
사회, 계층에 속해 있으므로 역사가의 판단은 객관적 판단이라기 보다는 가치론적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역사와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잘 알도록 노력하는 일이
아닐까? 역사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심판한다는 결정론적 입장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이고 정밀한 평가를 내리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는 주장은 역사철학의 윤리적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숙고와 비판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역사가를이끄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인간의
자유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해도 역사를 자연법칙,
절대이성 혹은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존엄성과 의지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위대성이란 오히려 계획되고 예정된 것을 거스르고 미지의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는 창조적 역량에서 발견되지 않을까? 역사가 연출하는 각 상황의 특수성과 복잡성은 섣부른
비교와 일반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역사가는 인류의 진행과정을 예견하며 자주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어떤 역사가도 발생한 것이 필연적으로 발생했어야 했던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역사에 대한 심판은 항상
주관적이고 현재진행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역사사라면 역사가
나아갈 방향으로 얼마간의 가치론적 목적을 제시하는 것도 윤리적인 차원에서 바람직한 선택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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