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어머님은 자주 장독대의 옹기를 닦으셨다. 햇살 좋은 날이면 장독대에서 정성껏 깨끗한 걸레를 들고 무슨 말인지 혼자 말을 중얼거리시며 옹기를 닦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 독백이 어린 내게도 자식들과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이라는 눈치는 쉽게 전달되었다. 또한 보름이 되어 만월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밤이면 어김없이 어머님은 정화수 한 대접을 옹기 위에 올리시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셨다. 달빛에 한복을 입은 어머님의 모습은 경건했고, 이런 어머님의 정성어린 기원과 희생의 덕이었을 것이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큰 일 없이 무탈하게 모두 60세의 장년을 넘겼다.
회고하건대 내 어머님 생의 반은 부엌과 장독대에서 옹기들과의 대화와 함께 한 시간이었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무고함 역시 어머님의 동선과 동행했을 것이고, 어머님의 그 간절함으로 점철된 인고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막내였던 나는 어머님께서 무엇을 기복하시는지 궁금했지만 어린 내게도 어머님의 기도가 목표하는 방향이 이해되었기에 다만 장독을 왜 자주 닦느냐는 질문은 자주 드린 것 같다. “얘야, 그건 숨을 쉬는 독이 지저분하면 장독의 숨구멍이 막혀 장에 곰팡이가 끼고 장맛이 좋지 않기 때문이란다.” 당시 나는 어머님의 이 말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이 숨을 쉰다는 말은 독 안의 물이 샌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러니 독이 숨을 쉰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어머님이 옹기의 숨구멍이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 도대체 숨구멍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공과 정성을 들이셨던 이유를 안 것은 어른이 되어서였다. 김치와 된장과 고추장, 젓갈 등 온갖 발효식품들이 썩지 않고 보관되는 비밀이 이 숨구멍에 있다는 사실을. 옹기에는 미세한 숨구멍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 숨구멍들을 통해 산소와 햇빛이 들어가기 때문에 젖산균을 비롯한 인체에 유익한 균들이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균들의 활동으로 옹기 안에 저장된 식품들이 맛있고 영양 있게 숙성된다는 것을. 옹기가 숨을 쉬는 과정에서 나쁜 성분들은 옹기 벽에 흡착되어 정제되기 때문에 옹기가 아닌 다른 용기에 넣어 보관하면 발효는커녕 그냥 썩어버리기 십상이 되는 것이다. 장독이 숨을 쉬는데 새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엄마들은 새 장독을 사면 그 옹기에는 간장을 담지 않고 된장독으로 먼저 사용했다. 된장에서 발효되는 염분 등으로 공기구멍이 메워지는 1, 2년 후부터 새지 않는 간장독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장독대에서 그 집안의 입맛이 나오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시절로 접어들었지만, 몇 개 되지도 않는 우리 집 장독인 옹기는 김치 냉장고와 밀폐용기에 자리를 내어주고 베란다에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용된 지가 오래되었다. 내 입은 이제는 완전하게 어머님의 손맛에서 아내의 손맛으로 길들여졌지만, 가끔 어머님의 손맛을 그리워하다 아내의 지청구를 듣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독대의 옹기 안에서 익혀진 발효식품들이 아득하게 내 입 안을 감도는 상상은 절로 나를 미소짓게 한다. 갈수록 시간을 견디어 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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