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주말주택을 가지는 일은 내 오랜 소망이었다. 토요일 새벽, 아침이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호수는 안개가 자욱하고, 대지는 농밀한 정적에 쌓여 지난 밤의 기억에 비몽사몽하는 시간을 깨우는 가을 해가 떠오르면 시나브로 밀려가는 안개에 드러나는 너른 호수와 높고 낮은 산들의 얼굴. 아마도 때는 늦가을 일테다. 높은 산에서 시작한 단풍은 급기야 산아래 사람의 마을까지 내려오던 중, 그 형형색색의 단풍은 시야 아래의 호수로 무리를 지어 빠져들고 있을 게다.
아는 지인들 서넛이 아파트를 떠나 가까운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를 가자 전원주택에 대한 아내의 성화가 잦아졌다. 그럴만도 한 것이, 나부터도 저물어가는 석양의 햇살이 아내의 좁은 어깨위로 내려앉는 데크의 파라솔 벤치에 앉아 김오르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이 아니던가. 그뿐이겠는가. 아내는 빨래감들이 마당깊은 빨랫줄에서 따사로운 햇볕에 뽀송뽀송 말라가는 모습과 솥단지가 걸린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는 꿈을 신혼 초부터 이야기했고 그건 너무 쉬워 꿈 꾸어야 할 일도 아니라고 나는 힌소리를 여러차례나 했을 터였다. 덧붙여 아내의 환갑일에 그런 집을 지어 선물하겠다는 약속까지 쉽게 늘어놓은 바에야..,
작년부터 적당한 집터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좀체 마음에 차는 집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선 면적이 터무니없이 컸고, 가격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내가 원했던 집터는 현재 사는 아파트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대지는 150평을 넘지 않아야 했고, 넓은 호수와 호수 주변의 산과 들, 원경을 달리는 높고 낮은 산들의 연속성이 넉넉히 시야에 잡혀야 했으며, 더불어 고향 언저리가 집 안에서도 가늠되어야 한다는 까탈스러운 전제 조건을 만족할 만한 집터를 구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기실 내가 그리던 집터는 이 시대의 문화 구라라고 할만한 유홍준이 절찬한 부석사 안양루 앞에서 바라보는, 아니 무량수전이 바라보고 있는 절터 같은 곳이다. 유홍준의 말을 빌려보자.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 끝에 안양루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안양루에 오르면 발 아래로는 부석사 당우들이 낮게 내려앉아 마치 저마다 독경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인데, 저 멀리 산은 멀어지면서 태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태백산맥 전체가 무량수전의 앞마당인 것처럼 펼쳐진 이 웅대한 스케일, 이것은 현세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극락의 장엄인지도 모른다. 9품 계단의 정연한 질서를 관통하여 오른 때문일까. 안양루의 전망은 홀연히 심신 모두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지루한 장마 끝의 햇살인들 이처럼 밝고 맑을 수 있겠는가.
유홍준은 덧붙인다. 무량수전 안양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국보 제0(제로)호'로 지정해야 한다고. 그는 숭례문이나 여타 아름다운 국보급 문화재보다도 부석사의 절광을 해동 제일로 칠만큼 목소리를 높힌바가 있다. 이처럼 안양루 앞에서 멀리 소백산을 주봉으로 한 태백 준령의 경관을 앞에 두고 우리는 일없이 빈 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눈길은 산자락이 뻗는 데까지 달리게 하여 벅찬 감동의 심호흡을 들이킬 뿐이건만 한 터럭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 이러한 원경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내 앞마당으로 끌어들인 곳. 그런 집터는 아닐지언정 십분 만족하는 땅을 구해 등기를 마쳤다. 소박한 집을 목표로 했기에 나의 전업인 한옥으로 짓는 일은 애초에 마음에서 접었다. 이어 공동주택을 짓는데 40여년의 공력을 지닌 친구를 이번 휴가에 불러들였다. 일주일에 이틀정도나 틈만 나면 찾아와 삶의 부조리한 터럭을 깨끗이 벗고 털어내는 곳, 면적은 20평 미만, 2층 구조, 소박하나 변변하며, 단순하나 의미가 깊고, 햇볕을 끌어들이는 시간이 길되 덥지 않아야 하며, 서재나 거실에서 경관 조망의 각도는 130도 정도 펼쳐지고, 밤에는 3층 옥상에서 별자리 관측이 용이하고, 홀로 튀지 않고 주변의 지형과 집들과도 능히 어우러지는 집을 철학으로 전달했다. 후년쯤 소박한 집 한채 지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