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식 그나마 접게 만든 ‘북핵 바람’
[윤태영의 기록14-2005년 설연휴] 눈꺼풀 수술과 단축된 휴가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부속실장
애초부터 설 연휴를 제주에서 보내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통령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발길을 제주도로 돌렸다. 아내 권양숙 여사와 두 명의 주치의, 그리고 부속실 직원들이 동행한 단출한 여행이었다. 어떤 행사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순수한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그저 따뜻한 남쪽의 섬에서 잠시 시름을 잊은 채 국정 운영의 책임감으로 잔뜩 오그라든 어깨를 펴고 라운딩도 하면서 즐기다 오면 될 일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듯이 대통령은 어쩌면 중증의 워커홀릭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오고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그런 상황은 본인만 모를 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대통령 자신도 어쩌면 그런 단계에 와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을 법했다. 어쨌든 그렇게 던져버리고 온 대통령직의 무거운 짐이었고, 탈출해서 벗어난 서울이었다.
그러나 제주의 바람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바람은 매서웠다.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법 드센 바람이었다.
공군1호기의 트랩을 내리는 순간 강한 바람이 대통령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는 멈칫했다.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관저를 나설 때부터도 내키지 않았던 걸음이 여전히 군데군데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쓴 다음, 멀리 한라산의 정상을 보았다. 날이 맑아서 산 정상이 그대로 보였다. 바로 앞에는 BMW 760 방탄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그를 차안으로 내몰았다. 방탄차는 중문을 향해 달렸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는 창밖을 외면했다.
수술 후 퉁퉁 부은 눈
대통령은 며칠 전 눈꺼풀 수술을 했다. 상안검하수증이었다. 위쪽 눈꺼풀이 밀려 내려와 자꾸 눈을 덮었다. 3일 간의 설 공휴일이 마침 한 주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으면서 앞뒤 샌드위치 데이를 포함하면 비교적 긴 설 연휴가 생겼다. 이 기회를 이용해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이때가 아니면 달리 할 시간도 없을 듯했다.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시간이 1주일 이상 계속되기는 어려웠다. 대통령에게는 이틀이 멀다 하고 두세 건의 공식 일정이 있었다. 외국의 정상이나 장관들이 방문해 회담을 하는 일, 새로 부임한 대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일, 새롭게 임명된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일, 그밖에도 기본적으로 만나야 할 외빈들이 적지 않았다.
이것은 의례적인 일들이었다. 그밖에도 각종 공식회의가 있었다. 국무회의도 있었고 청와대 내부의 수석보좌관 회의도 있었다. 각종 위원회 회의는 대부분 공개로 열렸다. 물론 외부 행사 참석도 있었다. 이 모든 공개행사에는 TV카메라와 스틸 카메라, 그리고 볼펜 기자로 구성된 풀기자단이 따라다녔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그들이 받아 적고 촬영했다. 대통령이 눈꺼풀 수술을 했다고 해서 그런 공식적인 일정에 불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퉁퉁 부은 눈을 카메라 앞에 노출시켜 국민들에게 보이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긴 설 연휴가 구세주인 셈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특별한 공식 일정이 없었다. 수술한 다음 날에는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통화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공식일정이라면 공식일정이었다. 다만 TV로 화면이 나가는 일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료화면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5일 아침, 전화 통화를 위해 실무진들이 올라왔다. 부속실이 사전에 이야기를 해서 준비 인원을 최소화시켰다.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이 혼자 올라와 전화 시스템을 설치했다. 전화 통화를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는 간단치 않았다. 대통령이 사용할 전화기에 통역자가 사용할 전화를 연결하고, 여기에 다시 최초로 전화 연결을 할 실무진의 전화가 연결되어야 했다. 이 시스템은 관저의 응접실에 세팅되었다.
통화를 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사전보고에는 안보보좌관을 비롯해 외교보좌관 등이 참석하는데 이날은 이종석 사무차장만이 관저로 올라왔다. 부속실 직원들을 제외하면 이종석 차장 등 세 명의 청와대 직원들만이 행사를 준비한 셈이었다. 그들은 수술 후 붓기가 오를 대로 올라있는 대통령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전화 통화에서 그는 제2기 부시 행정부의 정식 출범을 축하했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 실무진이 철수한 뒤 그는 이종석 차장과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북핵 보유 선언을 뒤로하고
부시 대통령과 통화가 끝나고 긴 시간의 칩거가 시작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청와대 인근의 고궁에라도 나들이를 하고 싶었지만 부어오른 눈 때문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눈이 괜찮은 상황이라면 이지원 시스템을 통해 내부 보고서들을 처리하기도 하고, 평소에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두 눈에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관저 내부에서 가족들과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고 TV를 보며 갇혀 지냈다. 그렇게 5박 6일을 지냈다. 외부와 유일한 소통은 설날인 9일에 김우식 비서실장이 인사차 전화를 걸어온 것에 응답한 일뿐이었다.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안개비가 내렸다. 그리고 10일 오후 그는 3박4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향해 비공식 휴가를 떠났다. 몇몇 부속실 직원들만 대동했다. 두 명의 주치의도 동행했다.
때마침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북한 측의 답이 있었다. 이날 오전의 일이었다. 북한의 외무성이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보고를 접하는 순간 그는 표정도 없었고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이 섞인 침묵이었다. 그동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지구를 한 바퀴 돌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여론에 호소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었다.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NSC에 별도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언론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통령과 청와대의 반응을 묻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말은 다 기사가 된다. 말을 하지 않는 것 역시 기사가 된다. 왜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분석기사도 뒤따른다. 이런 중대한 사태 앞에서 대통령의 코멘트가 없다는 것은 적대적인 언론들이 비난을 쏟아내기에 좋은 일이 된다. 그는 NSC가 적절하게 알아서 입장을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제주도 행이었다.
북핵 보유 선언이라는 상황 앞에서 대통령이 제주도로 휴가를 떠나는 것을 두고도 공격이 제기될 수 있었다. '대통령이 그렇게 한가하게 쉬고 있을 때냐?'는 공격이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예정대로 제주도로 가는 공군1호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주도 행을 취소하는 것은 그가 가장 꺼려하는 선택이었다. 북한의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예정된 휴식을 취소하면서까지 허둥대는 모습은 결코 보이기 싫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존심까지 생각해야 했다.
거센 바람 맞으며 서있던
마침 NSC상임위에서도 대통령이 나서서 무언가 대응해야 할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을 보내왔다. 제주도 휴가일정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북핵 보유 선언과 관련된 상황은 유선을 통해 수시로 보고하기로 되었고, NSC를 중심으로 열리는 각종 회의의 결과는 곧바로 문서로 정리되어 이메일을 통해 보고하기로 정리되었다. 결국 북핵 보유 선언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휴가를 방해하지는 못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제주도의 바람이었다. 북핵 바람이라도 되는 듯이 바람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내려간 첫날 그는 숙소에 머물렀다. 저녁식사를 위해 잠시 외출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숙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경호실장, 주치의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삼겹살에 소주를 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 수술한 부위가 아물지 않아 불가능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숙소의 베란다에서 제주도의 바다와 산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바람이 거세었다. 그는 주치의, 경호실장과 함께 실내에서 환담을 나누었다. 송인성 주치의의 입담이 자칫 가라앉아있을 수도 있었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한밤중,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은 상념들 때문이었는지, 쉬지 않고 윙윙 울어대는 제주의 바닷바람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침실을 나왔다. 밤 2시, 한밤중이었지만 바깥은 숙소 호텔의 조명과 인근 호텔의 조명들로 환한 편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테라스의 창을 때리고 있었다. 찬바람을 맞아볼 요량으로 그는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곳에서 문득 아래를 보니 한 남자가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 서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또 한 사람이 서있었다.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저 친구들은 명절 휴일에 이곳까지 와서 밤잠을 못자고 저렇게 있구나.’
경호원 한명이 테라스에 나와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했다. 한밤중에 테라스에 나온 대통령의 모습을 보자 더욱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는 제주의 밤공기를 만끽하려던 계획을 접고 서둘러 침실로 돌아왔다.
“바람 때문에 안 되겠다”
다음날에는 인근의 중문 골프장에서 라운딩이 예정되어 있었다. 바람은 잦아든 것처럼 보이다가도 다시금 강해지곤 했다. 제주도의 바람이 유감없이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9홀을 미처 다 돌기도 전에 숙소로 돌아가자고 일행에게 청했다. 일행은 함께 숙소로 귀환했다. 당황한 표정의 부속실장을 쳐다보면서 그가 이야기했다.
“그냥 올라가세. 바람 때문에 안 되겠다.”
부속실은 귀경 준비를 서둘렀다. 일정이 3박4일에서 1박2일로 단축돼버렸다. 바람이 그의 제주도 휴식을 방해하는 데 끝내 성공한 것이었다. 아니면 울고 싶은 심경에 제주도의 바람이 뺨을 때려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핵 보유선언도 그러했고, 거기에 경호원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대통령은 이래저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 휴식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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