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도중에 중요한 판단을 요구해서는 안 되네”
[윤태영의 기록-8] 오류를 줄이는 방법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부속실장
“선걸음에는 그런 판단, 하지 않겠다고 했지?”
노무현 대통령이 1부속실장인 나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네, 그랬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가 반문했다.
“그랬는데, 자네 왜 그러나?”
그는 나를 심하게 꾸짖었다. 만찬을 위해 대통령이 관저 복도를 지나 손님들이 기다리던 대식당으로 이동하던 중의 일이었다. 간단한 보고와 함께 시급한 결정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나는 함께 걸으면서 의견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아니, 반문 대신 호된 질책을 했다. 약간의 찌푸린 인상을 뒤로 남겨둔 채 대통령은 만찬장으로 들어섰다.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통령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부속실은 대통령의 일상을 보좌했다. 개인적인 일정을 주로 챙겼다. 대통령이 수시로 이야기하는 지시사항을 각 수석·보좌관실로 전달하는 일도 했다. 반대의 일도 있었다. 각 수석·보좌관들이 요청하는 작은 사안들이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간단히 보고해달라거나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해달라는 요청들이었다. 물론 중요한 사항들의 경우는 비서실장과 관련 수석들이 대면보고를 통해 대통령의 의견을 직접 묻거나 들었다. 그 외에 사소하지만 대통령의 의견을 확인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가까이 있는 부속실이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부속실이라 해서 24시간 수시보고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만큼 대통령은 한가한 직업이 아니었다. 회의 아니면 업무, 거기에 잠깐의 틈새를 이용한 최소한의 휴식이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항상 분주했다. 결국 부속실은 일정과 일정 사이의 틈을 활용해야 했다. 다음 일정이 다른 장소에서 있는 경우 이동하는 시간이 비교적 좋은 기회였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나는 대통령에게 간단한 보고와 함께 의중 확인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날, 대통령은 나의 그 습관에 종지부를 찍도록 만들었다.
그로부터 다시 수주일 전의 일이었다. 본관 세종실에서 국무회의를 마친 대통령이 중앙 홀을 향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떤 장관이 빠른 걸음으로 대통령 옆으로 다가왔다. 그 장관은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 대통령의 의견을 물었다. 해당 부처의 기능 조정과 명칭 변경에 관한 일종의 건의였다. 50미터가 채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갔다. 충분히 검토할 겨를도 없었는데 대통령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한 장관은 청와대 본관을 떠났고 대통령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장관의 건의 내용을 차분히 앉아서 반추한 대통령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곧바로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신중히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재고하자는 의미였다. 전화를 끊은 대통령은 가까이 있던 비서들을 불러 이야기했다.
“이렇게 걸어가는 도중에 중요한 판단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네. 판단을 그르칠 수밖에 없어. 부속실도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게.”
그리고 수주일 후 나는 결국 이 ‘유념’을 못한 잘못으로 호된 질책을 듣게 된 것이었다. 선걸음에 대통령의 판단을 받아내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대가였다.
2000년 초여름이었다. 그해 4월 부산의 선거에서 낙선한 노무현 전 의원이 여의도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한 가지 일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일종의 토론 사이트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우선 온라인 공간에서 주제를 선정하여 찬성과 반대의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토론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의견이 수렴되면 해당 주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리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 새롭게 찬반 토론이 진행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의견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일단 그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선뜻 자신이 없었다. 몇 주일 망설이며 머뭇거리던 중에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작업은 자연스럽게 보류되었다. 이듬해 3월에 장관직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본격화된 대통령 후보 경선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결국 이 구상은 2008년 퇴임 때까지 구체화 작업이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퇴임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이 작업에 몰두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민주주의 2.0’ 사이트였다. 그가 이를 통해 추구했던 것은 합리적인 의견을 수렴해내는 과정이었다. 사이트 명칭이 말해주듯이, 그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구조를 민주주의 시스템의 근간으로 생각했다.
그는 ‘토론 마니아’였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토론을 선호했다. 중요한 안건의 결정을 앞두고는 반드시 토론을 거쳤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판단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특정한 방안을 결정할 경우에 발생할 문제점도 파악할 수 있었고, 그 대안까지도 미리 모색할 수 있었다. 토론은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장치였다.
청와대 인사추천시스템을 만들 당시 그는 민정수석실과 인사수석실의 역할을 구분했다. 인사수석실은 추천을 담당했고, 민정수석실을 검증을 담당했다. 인사는 포지티브였고 민정은 네거티브였다. 견제와 균형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역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인사추천회의에서 후보자의 적합성을 놓고 이견이 있을 경우, 대통령은 그 반대의견을 요약해서 함께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소수라 해도 부정적인 의견을 최종 판단에 참고하려는 것이었다.
‘독대의 금지’는 판단의 오류를 최소화하려는, 가장 대표적인 노력이었다. 독대가 완벽하게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록을 위해서도, 오류의 방지를 위해서도 그는 가급적 독대의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독대는 참모나 장관의 일방적인 정보에 의존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될 위험이 컸다. 부득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는 다음 기회로 판단을 미루었다. 소수의 참모들만 있는 자리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경우에는, 더 많은 참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번 더 확인과 검증을 거치곤 했다. 독대가 없으면 대통령의 오류도 최소화되지만, 보고자에 의해 대통령의 의중이 왜곡되어 전달되는 일도 최소화되기 마련이었다.
수석·보좌관실을 대신하여 간단한 사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경우, 부속실은 관련 사항들을 철저하게 챙겨야 했다. 대통령의 반응 때문이었다. 한마디를 듣고 대통령이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그는 반드시 되물음을 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사소한 문제라도 두세 가지의 반문을 통해 내용을 파악하려고 했다. 결국 부속실도 꼼꼼하게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두세 가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열 가지 이상의 내용을 꿰뚫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대통령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또 참모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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