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펌>[윤태영의 기록-4] 정치라는 흙탕물

체 게바라 2013. 12. 14. 01:09

 

 

“바보들이 정치하는 건 아닙니다” [윤태영의 기록-4] 정치라는 흙탕물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부속실장

 

 

정치인 노무현은 원래 폭탄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양수산부 장관 퇴임 직후인 2001년 3월, 내가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에 합류한 지 한 달 즈음이 되던 날이었다. 이날 그는 보수언론의 데스크와 폭탄주를 마셨다. 정치부장들이었다. 관계개선을 해보려는 참모들의 시도였다. 분위기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특정 언론사의 여론조사를 놓고 시비가 있었다.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을 불가능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언쟁은 거듭됐고 불편함은 커졌다. 물론 파국은 아니었다. 헤어질 때는 악수도 나누었다. 노무현 전 장관은 꽤 취한 상태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동을 떠난 차는 이내 명륜동 자택 앞에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려는 내 어깨를 그가 툭 쳤다.

“윤태영, 캠프에 잘 들어왔어. 이제 우리가 세상을 바꿔보자. 한번 해보자.”

그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캠프에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듣는 환영사였다. 장관직무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그간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술의 힘을 빌려 비로소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미안함과 자신감이 뒤섞여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정치부장들만큼이나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대통령이 되리라는 기대는 높지 않았다. 최선은 다할 생각이었다. 그런 나의 합류를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특유의 동지의식이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사람과 참모를 자신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호기에는 공허함이 배여 있었다. 자신감에서는 외로움도 묻어 나왔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의 환영사가 고맙게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10여 년 이상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온 정치인이었다. 94년 자서전 집필작업을 하기도 했고, 95년 부산시장 선거홍보물을 만들기도 했다. SBS뉴스대행진을 할 때는 칼럼 꼭지의 일부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후에도 연설문이나 홍보 관련 일로 교류를 계속했다. 나는 항상 ‘그의 편’으로 분류되던 사람이었다. 새삼 고마워할 일은 아니었다. 굳이 미안해할 일도 아니었다. 그의 상황이 그랬다. 스스로의 자신감은 있었지만 앞날은 더없이 불투명했다.

 

 

90년 3당합당이 그 시작이었다. 그 이전의 노무현은 국회의원이었지만 정치인이 아니었다. 투사였다. 운동가였다. 그래서 의원직사퇴서도 쉽게 던질 수 있었다. 3당합당이 그를 직업정치인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지역구도 해소를 위해 ‘정치’라는 흙탕물에 발을 깊이 담갔다. 그가 정치를 바꾸고 정치가 다시 그를 바꾸는 10년이 시작되었다. 풍화의 과정도 겪어야 했다. 총선이나 대선을 계기로 재야에서 새로운 인물들이 수혈될 때마다 그는 매력 없는 기성정치인이 되고 있었다. 청문회 스타로 기억될 뿐, 현실을 움직이는 힘 있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원외의 노무현은 그렇게 지역구도의 굴레를 쓰고 가시밭길을 걸었다. 평범하지 않은 정치역정이었다. 스스로도 힘들어 때로는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다. 93년 광명보궐선거, 95년 경기도지사, 98년 서울시장, 종로보궐선거에 이르기까지, 지역구도의 주술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최종적인 선택은 다시 부산이었다. 그렇게 뚜렷한 궤적을 남기며 걸어왔지만, 그래서 더욱 미래를 알 수 없는 정치인. 그가 노무현이었다.

 

그는 자주 이렇게 이야기했다.
“정치물이 독하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독한 물을 마셔야 했다. 이상을 위해서는 현실을 버텨야 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곳이 정치권이었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정치는 그에게 애증 그 자체였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했다. 정치라는 흙탕물에 기꺼이 발을 담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2005년 10월, 모 수석과의 조찬이 있었다. 그는 수석에게 출마 의향을 물었다. 반응은 손사래가 먼저였다. 그런 곳에는 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그런 곳’의 의미가 문제였다. ‘시끄럽고 못된 곳’이라는 뉘앙스였다. 그가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바보들이 정치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정치 일반을 경멸하는 표현을 싫어했다. ‘정치’이야기만 나오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참모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손이 모자라서 기용하고 있지만 자신들만 깨끗한 척 하면 안 되는데……”

이랬던 그가 퇴임 1년이 지난 2009년 3월에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정치, 하지마라”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20년 동안 걸어온 역정이 하나의 소회로 모아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몇 가지 수렁들을 그 이유로 들었다. 거짓말, 정치자금, 사생활 검증, 이전투구, 그리고 고독과 가난이었다. 끝 대목에 가서 그는 단서를 붙였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정치인을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정치가 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정치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먼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의 처지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이 알아주지 않는 머슴들은 결코 훌륭한 일꾼이 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하지마라’는 결국 ‘정치인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하나의 역설이었다. 순탄치 못했던 자신의 정치역정에 대한 회한이었다.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끝내 이루어낼 수 없었던 그 어떤 목표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다. 흙탕물 속에서 피워낸 연꽃과도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