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자아와 타자

체 게바라 2013. 6. 12. 23:45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자아라고 부르는 그것, 선택, 고투, 우연과 시대가 비벼져서 한 사람의 실존이 빚는 풍경이 출현한다. 그 풍경을 삶이라 부르자. 한편으로 삶은 행위인데 그 실존적 企投의 본질은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자기실현을 위한 모든 수고를 함축한다. 사람은 행위, 기투, 수고를 통해 그의 존재를 세계에 등록하는 것이다. 기투는 철학적으로 현재 초월하여 미래 자기 내던지는 실존 존재 방식으로서 하이데거 사르트르 실존주의 기본 개념이었다. 바로 이 행위, 기투, 수고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형이상학적 존재이던 자아를 주체로서 당당하게 등장시키는 것이다.

 

주체, 나는 항상적으로 나 자신인바, 신체를 가진 또 다른 존재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홀로 나일수 없고, 타자와 맺는 관계의 맥락 속에서 나는 나로 태어난다. 나는 수없이 많은 너 속에서 발견되는데 거꾸로 말하자면 너는 타자의 자리에 놓인 바로 나다. 그렇다고 나와 너는 존재의 위상학에서 동일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는 떨어져 있다. 나는 너의 부재 속에서 비로소 나다. 나는 너에게로 향함으로써 이타적 실존을 산다. 이때 사랑이란 나의 자기됨과 내 존재의 확장을 포기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는 나를 너에게 줌으로써 살아지는 이타적 실존이다. 너와의 사랑에 빠진 나는 자발적으로 너에게 갇힌 자요, 너의 볼모가 된 자다. 이 사랑의 감정은 존재 안에서는 겸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음이지만 존재를 넘어가는 탁월이며 높음이다. 레비나스는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고 주장한다. 

 

나는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다. 타자의 맞은 편에 서 있는 나, 주체라고 부르는 이 존재는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한에서 그 생각함이 곧 나의 존재함의 증거다. 나는 사유하는 실체이며 사유하는 실체를 대상화하며 자기 앞에 세우는 존재가 바로 나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니체는 부정한다. 니체에 따르면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들어져 첨가된 것, 그 뒤에 숨겨진 것'이며, 그 본질은 허구다. 니체는 "정신도, 이성도, 사고도, 의식도, 영혼도, 의지도, 진리도 없다. 이들 모두는 쓸모없는 허구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자기됨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타자가 대신 할 수 없는 행위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향유라고 한다. 향유는 나의 세계가 관계하는 방식, 신체를 매개로 한 생물학적 교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혼자 무엇인가를 먹고 마실 때, 공기와 물과 햇볕 등을 즐기고 있을 때 무리에서 저를 분리해서 오롯한 자기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향유는 개체에 작용하는 개별화의 원리다. 나는 향유를 통해서 자기로 거듭난다. 즉, 즐김과 누림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레비나스는 계속 주장한다.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는 낯선 이다. 그 낯섦은 차라리 타자의 본질이다. 낯선 것은 끔찍하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했다. 타자는 언제나 내 앞에 지금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 수 없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으로 서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을 가진 존재다. 타자는 내 앞에서 감추어진 그 무엇인데, 그것을 찾는 몸짓이 에로스다. 그러나 타자를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선을 행함으로써만 이 근본 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