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이승에서의 이별

체 게바라 2013. 4. 10. 22:50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른 이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이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사용할 만한 어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고통의 감정이 앞서서 언어를 억제한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이것은 괴로운 경험이다. 여전히 살아 숨쉬는데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죽어가는 것과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문제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위중한 상태에 처한 사람 앞에서 할 말을 잊고 연민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은 꼭 누군가 죽어가거나 죽음을 슬퍼하는 경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가 도달한 문명 단계에서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강한 감정적 표현을 해야하는 많은 경우에도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 사랑과 정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빈번하게 벌어진다. 

 

죽음이란 살아있는 사람의 문제이다. 우습게도 죽은 이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문제되지 않는다. 지구상 많은 피조물 중에 서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존재뿐이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의 존재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종말을 예견하고 어쨌든 그 순간이 닥쳐올 것이라고 인식하며, 생명의 종말이라는 위험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개인적 또 집단적으로-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인간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로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손에 붙들린 파리는 살인자의 손아귀에 있는 사람처럼 마치 자신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는 양 파들거린다. 그러나 생사의 위기에 처한 파리의 방어적 행동은 그 種이 가지고 있는 학습되지 않은 천성이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가 죽었는데도 어느 곳에선가 새끼를 떨어뜨려 잃어버릴 때까지 품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어미 원숭이는 자신의 새끼 혹은 새끼의 죽음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 알고 있기에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극단적인 형태 속에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들이 다른 인간 존재로부터 떠나갈 때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도움과 사랑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단지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관념에 대해 방벽처럼 막아놓았던 방어적 환상을 흔들어놓는다. 자기애는 너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죽어가는 사람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면 우리의 소망적 환상은 깨질 위험이 있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대힌 예감을 부인하려는 그 압도적인 요구의 배후에는 대개 억압된 죄의식이 존재한다.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 혹은 형제들이 죽기 바라는 소망과 관련되며, 그와 동시에 자신이 죽기를 그들이 바랐을 것이라는 생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개별 인간의 삶에서 그 삶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하는 바와 동떨어진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헛되다.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를 가진다는 느낌과 인식, 그리고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느낌과 인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가 한 인간의 삶을 일컬어 '의미 있다' 혹은 '의미 없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는 중요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이러한 이해는 쉽게 증발되어 버린다. 고도로 개별화된 현대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외부세계와는 별도로 외로이 존재한다는 감정이 만연해 있고, 그것과 더불어 개인-그 자신-은 전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관념이 팽배해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절실한 것은 자신이 비록 외로이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이 아직도 의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가장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지나친 동정은 무관심만큼이나 참기 힘든 것이다. 또한 외로이 죽는다는 관념은 죽어가는 과정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인해 나 자신의 소우주, 그것과 결부된 독특한 기억, 나만이 알고 있는 감정과 체험, 나 자신의 지식과 소망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죽어가는 과정에서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분리되어 혼자 남겨질 때의 느낌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가 다른 이에게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진정 외로운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의 죽음이 다른이에게 아무런 정서적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이야말로 고독의 극단적 형태인 개인적, 사회적 배제에 해당할 것이다. 

 

한 인간에게 죽음의 방식은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는 것으(또는 부질없고 의미 앖는 것으로)으로 느끼느냐에 달려 있으며 죽는 방식은 그가 인생에서 세운 목표에 얼마나 가까이 도달했는지, 그리고 설정한 과제를 얼마나 실행했는지에 적지않게 의존한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더 쉬운(보람있는 마감으로) 것으로 다가오며, 인생에 소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 힘든(공포와 두려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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