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란 원래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데 익숙하다고 한다. '나는 강아지를 보고 있다.'라는 평범한 상황도 철학자는 '주체인 나는 대상인 강아지를 주변 세계와 함께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별것 아닌 일도 철학자에게 가면 마치 대단히 중대한 문제인 양 포장되고 과장된다.
수 세기 동안 인식론의 테마가 되어 왔던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의 문제도 그렇다. 철학자들은 주관/객관의 분리가 엄청나게 심각한 위기라도 초래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주관/객관의 확연한 분리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실증주의 인식론에는 허점이 많다. 실증주의는 사물만이 아니라 인간마저도 조잡한 방식으로 대상화시킴으로써 살아 있는 인간을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분석하고 해부해 죽은 인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실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체의 차원을 아예 팽개쳐버린 구조주의 인식론은 더 큰 잘못이다. 존재하는 게 자명한 주체를 굳이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체의 포기가 가능하기는 할까? 주체가 주채의 문을 닫아거는 구조주의는 주체가 주체를 객관화하는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논리적 모순이 아닐까?
그보다는 현상학적 해법이 훨씬 더 유용할 수 있다. 후설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자연적 태도'라고 부르며 주관/객관의 문리 이전에 인간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줄 안다고 말했다. '내가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내가 세계를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발견하여 경험한다는 뜻이다. 나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내게 그냥 주어져 있는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등의 신체적 감각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후설은 생활세계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생활세계 속에서 인간은 인식과정을 상세히 분석힉; 전에 자연스러운 태도로 세계를 인식하며 경험한다. 즉 인간은 주관/객관의 분리를 따지기 전에 이미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성의 개념을 도출한다.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 인간이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대상화하는 이중적 존재 방식을 취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주체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아무리 하이데거 자신은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방법은 주체의 위치를 세계 외적 위치(반성적 주체, 초월적 자아)와 세계 내적 위치(전반성적 주체, 경험적 자아)로 분열시키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분열된 두 줓[를 억지로 매개하려 한다면 그토록 거부하던 실증주의 함정에 빠지게 될 뿐이다.
하버마스는 애초에 주체의 분열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주체는 분열되어 있지 않다. 생활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은 곧 주체와 대상이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거꾸로 말하면 주체와 대상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주체는 이미 언어를 통해 상호작용에 참여하고 있다. 주관과 객관을 논하기 전에 이미 상호주관적이다. 과거의 주관/객관 개념은 잘 돌아가고 있는 생활세계를 쓸데 없이 분리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생활세계에 상호주관성이 작용한다고 해서 개인들 간의 의사소통이 언제나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구조주의자들처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사회가 존속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의사소통이 부분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이 의사소통의 통로를 최대한 넓혀 상호주관성이 완벽하게 작용하도록 하는 데 있다.
하버마스는 현대사회의 의사소통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적 영역은 경제 제도에 의해 침해 당하고 공적 영역은 행정 제도에 의해 침해당한다.'(의사소통행위이론) 사적 의사소통은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 공적 의사소통은 관료제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 결과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해법은 생활세계를 자본과 관료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상호주관성에 의한 투명한 의사소통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의사소통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다.
하버마스는 이성 자체를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이성의 기획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본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과 달리 계몽주의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계몽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지도 않고 계몽의 기획을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건전한 태도다. 그러나 만약 이성이 회생 불가능한 병에 걸려 있다면 그의 계몽주의는 뇌사상태로마나 이성을 살려놓겠다는 안타까운 모성이 아닐까? 투명한 의사소통으로 상호주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안쓰러워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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