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사문화된 국체를 넘어서는 공화주의를 생각하다

체 게바라 2013. 2. 6. 16:50

 

 

대통령 중심제도 아래에 살고 있으면서 자주 가지게 되는 불편한 용어가 있다. 바로 우리 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국민 누구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조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이 나라가  정치적 정체성은 민주정이며, 국가적 정체성은 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적 버팀목으로 헌법에 선언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흔히 관용, 다양성, 다수결주의, 개인의 자유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 같은 가치들과 관련이 깊고, 공화주의는 흔히 개인적 이익의 관점이 아닌 공동선, 공공의 이익, 보편적 평등의 권리와 의무 등과 같은 가치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우리의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과연 공화주의를 바탕으로하는 공화정이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제대로 구현되었던 시대나 정권이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과 만나면 답답해지고, 그동안 정권을 담당했던 대통령들 개개인이 체화하고 있는 공화주의에 대한 이해와 정신이 현실적으로 인민의 삶에 투사되는 정도를 바라보면 공화주의란 그저 헌법이라는 먼지낀 법 조문에 불과한 것이라는 불경(?)한 상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비록 그것이 개인적 이기심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부의 축적, 번영의 자유를 옹호한다. 그런데 공화주의의 근본은 법치국가 더하기 사회정의다. 법의 통치라는 법치주의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는 있을지언정, 공화주의에는 미치지 못한다. 사회정의란 私人間의 자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국가가 법에 의해 보장된 일정한 정도의 평등에 주목하고 이를 구현하고자 노력할 때 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화주의에서는 정치가 경제보다 우위에 있고, 민주주의에서는 경제가 정치를 지배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말이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여느 정치인이건 헌법에 명시된 공화주의적 덕목을 실천하자는 정치인이 더 애정이 가고 살갑다. 그저 민주주의만 입으로 나불거리는 정치인들만 신물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레지스 드브레의 '시세를 거슬러(1992)'에 의하면 진정한 공화정은 민주주의적이며, 자유 더하기 이성이다. 자유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뿐, 공화주의에는 미치지 못한다. 공화정에서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의 동물로 정의된다. 공화국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닌 것은 신의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로서다. 가령 프랑스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낮은 곳의 시민들이 선택한 헌법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고, 미국에서는 저 높은 곳을 상징하는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 이는 공화주의적 질서가 조물주의 선의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시민에 의해 쟁취된 합리적인 자율이라는 측면에서 세속적임을 상징한다. 또한 공화정은 관용 더하기 정치, 사회적 단일성의 원리를 갖는다. 정치, 사회적 단일성의 원리란 공동선, 혹은 공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다. 민주주의의 특수주의와 사적인 이익을 초월하는 보편적, 일반적(평등적)인 이익에 대한 지향을 그 근거로 한다. 공화주의에서는 국가가 사회의 위에 위치하고, 민주주의에서는 사회가 국가를 지배한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민주주의가 독보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공화주의의 고향 프랑스마저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자유의 관용과 법치만 선양될 뿐, 이성, 공공선, 사회정의 같은 말들은 대처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표퓰리즘으로 둔갑하거나 악의적 좌빨의 논리로 공격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확산은 어느 정치가들에게는 사회주의의 사망을 부고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말로 표현되기도 하고, 혹자는 냉전의 종식 이후를 이데올로기 경쟁에 민주주의의 승리로 최종 종결되었다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가 정치를 대체해버린 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보편적 질서가 얼마나 더 맹목적이며, 처참한 디스토피아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현실로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앞세워 경제가 정치를 대체하자 사회는 물론 국가 간에도 탐욕의 열정만이 넘치는 경제를 앞세운 세련된 새로운 봉건체제로 교체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공화주의적 덕목이 국가와 사회를 주도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 주도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이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이 대통령 퇴임후 꿈꾼 나라를 상상한다. 노무현은 퇴임전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에 주목했다. 생태도시는 “1980년대 대처의 대형 장치산업 폐기정책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방식이며, 주민의 주도로 황폐한 시가지를 재생하는 마을 만들기 회사인 ‘개발 신탁 development trust’도 보수정권 시대에 탄생했다.” (요시다 다로 지음, 안철환 옮김,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234쪽, 들녘출판사)

 

노무현은 도시든 농촌이든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참여해 협력하는 재임시에는 혁신도시로, 퇴임 후에는'봉하마을'에 정성을 기울였다. 국가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기업과 NGO와 참여하는 시민이 평등한 수평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참여와 협력을 통해 만들어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질문으로 던져놓은 것이었다. 그것이'봉하마을'이었다. 노무현 사후 5년이 되어가는 지금 '봉하마을'이라는 커뮤니티를 성찰해보면 노무현이 어떤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는지에 대한 단초가 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와 가치를 함의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공화주의적 공동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