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9대 총선에서도 조중동과 새누리당에 의한 진보적 정당과 후보자에 대한 '빨갱이' 공격이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 오프라인에서는 어버이연합으로 대표되는 극우보수 단체에 의한 테러에 가까운 진보적 후보자에 대한 비토 시위가 연일 이뤄졌고, 사이버에서는 고루한 보수세력에 대항한 진보의 새누리당에 대한 수구꼴통이라는 방어적 기제는 그리 효과적인 대응수단으로 먹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빨갱이와 수구꼴통이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거칠게 진행되고 있는 20세기적 이념 논쟁과 이를 확대 재생산, 증폭시키고 있는 제 정당들과 이익집단들은 오히려 이 이념 프레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쉽고 단순하고 효과적으로 전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ideologie)의 어원은 매우 상징적이고 재미있다. 라틴어로 ‘내가 본다’라는 뜻인 ideo와 논리나 이론을 뜻하는 logos를 합성한 말이니 결국 ‘내가 보는 논리’가 곧 이데올로기다. 남이 보는 것이나 남과 함께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이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순덩어리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지배 논리로 포장해서 보여주는 게 곧 이데올로기라고 외쳤다. 맑스에게 이데올로기란 해체해야 할 대상이었다. 허나 그는 우습게도 자신의 주장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1926년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 ‘이데올로기는 사회 현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신념들의 집합’이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확장된다. 이 이론 때문에 맑스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명제가 성립하였고 이데올로기를 저주했던 맑스가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확장을 거듭하던 이데올로기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무렵인 1950년대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주장했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제 유토피아라는 청사진을 믿을 사람은 없다. 오늘날 새로운 의견 일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다. 복지국가를 용인하고, 권력 분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혼합경제체제를 인정하는 다원론이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이 났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시장에 개입해 공정성을 관리하는 혼합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사회주의 평등 이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으며,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는 복지개념을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복지개념을 인정하고 있다. 벨은 경제적 성장으로 인한 화이트칼라의 급격한 증가에 주목하여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즉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의 증가를 계급구조의 붕괴로 본 것이다. 그러나 벨은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데올로기라는 수단을 부정했을 뿐이었다. 생전에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자로 자신을 표현했던 그가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어떤 분야의 후진성을 지적할까를 상상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복지, 경제민주화, 실질적인 정치 민주화가 성취된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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