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패션은 우상숭배인가?

체 게바라 2012. 1. 25. 21:50

 

패션은 우상 숭배인가?

안데르센의 유명한 코미디 '황제의 새 옷'은 패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 어떤 것인지 묻고 또 거기에 정답을 제시한 거의 유일한 문학 작품이다. 두 명의 사기꾼이 황제를 찾아와서 황제에게 세계 어떤 것과도 공통적이지 않고, 대중의 상식과 공통 감각과 구별되는 예외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하는 데, 놀랍게도 그 옷은 보이지 않는 옷이었다. 사기꾼들은 이 옷을 가리켜 이 옷은 오로지 바보가 아닌 자, 지자(智者)의 눈에만 보인다고 말한다. 황제가 그 옷을 입으며 말한다. "내가 그 옷을 입으면 나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할 수 있을 거야."

 

옷, 그것은 벌거벗은 자연 위에다 부유함과 가난함이라는 확실한 가치를 새겨주는 상품이라는 점에서, 흉한 것과 아름다움(이른바 장식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는 위장술이라는 점에서 세속적이다. 요컨대 패션은 오로지 세속 사회의 문맥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이기에 사회적 문맥에 매개된 인간의 특성을 나타낸다. 사회적 문맥이라는 말로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모든 형식을 일컫는다. 일반성을 띠는 이러저런 형식을 통해서만 두 발로 걷는 어떤 존재는 인간으로서 사회 안에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형식으로서 패션은 벌거숭이 자연이 사교계의 까다로운 문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장 같은 것이다. 옷을 입은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인간은 이미 자신의 옷차림을 기본적으로 돌본다. 그는 거울에다 자신을 비추어 보았고, 또 그 모습을 응시했다. 사회성이란 적절한 몸가짐을 하는 것이다. 가장 섬세한 사회적 관계들은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회적 관계는 모든 불분명성에다 엄정성의 옷을 입히고 사교성을 부여하는 그런 외관을 보호한다. 세계는 서로 동류인 인간들 간의 사교계이다. 동류의 인간들은 그들의 사교를 가능케 하는 공통 형식으로서의 패션 주위에 모여 있다. 세계 안에서 타인은 그가 입은 옷 자체에 지배되어 있는 대상이다. 그런데 이 사교계의 형식, 즉 옷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늘 계급적, 인종적 흔적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옷은 마치 지구상의 계급적, 인종적 편차를 가늠하기 위한 기준 역할을 하는 백인들의 이상적 얼굴처럼 작동한다. 수많은 계급적 상징들로 가득 찬 복식사 전체가 이를 증거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패션이란 우상이 아닌가? 우상이란 시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의 투영이라는 데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선이 우상 속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우상은 시선에 대해서 아무런 위엄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진리의 나타남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진리와의 만남은 모세가 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우리가 귀찮아하는 것 또는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대면하는 강제적인 사건이다. 계급적 우월성의 표현으로서의 패션은 계급적 질서 속에서 통용되는 가치들에 순종한 인간들의 시선이 선망하는 것, 보고자 욕망하는 것이 투영된 것이며, 이런 뜻에서 그것은 하나의 우상 숭배이다. 야생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듯이 보다 복잡한 장치들로 속을 채운 우리 사회의 인간들은 옷을 숭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안데르센의 황제가 그랬듯 인간은 세계 안에서 입어보는 모든 옷에 만족하지 못하기 마련 아닌가? 결국은 세계 안에 널리 통용되는 구급 취향과 건전한 공통 감각의 고삐를 풀어버리고, 세계가 우리에게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인 세속적 가시성을 뛰어 넘어 세계와 공통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험한 길을 걷기도 하지 않은가? 진리를 찾는 자의 눈에만 보이는 예외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옷, 현상계 저편에 있는 옷에 대한 열망이 있지 않은가? 현상계 저편의 초월자를 열망하는 종교들이 그들의 사원을 아이콘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그 채색된 장식품을 통해 현상계 저편의 보이지 않은 것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플라톤이 선의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욕망이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욕망 말이다. 대성당의 아이콘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려는 우리 욕망의 목격자이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옷은 현상계의 아름다운 옷 너머 저편에 숨어 있을 미지의 아름다움으로 쉼 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황제의 욕망의 목격자이다. 그렇다면 패션은 시선을 세계 안의 가시적인 아름다운 옷 속에 안주하며 거기서 만족하게 하는 우상 숭배인가, 아니면 가시적인 것 저편의 보이지 않는 옷을 향해 휴식을 모르고 움직이는 시선의 운동인가?

 

고전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은 늘 구성 부분들 간의 조화에서 성립한다. 조화로운 형식은 아름다움의 근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은 어떤 의미에서 사물의 벌거벗은 본모습을 은폐해버리는 허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형식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전형적인 의미에서 형식이다. 고대의 조각상들은 진정으로 벌거벗고 있지는 않다. 겉보기에 벌거벗고 있는 고대 조각상들의 신체는 그것을 덮고 있는 형식에 의해 위장되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일상을 통해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패션은 초월의 모험이며, 진정한 옷, 한 번도 아직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은 옷, 바로 보이지 않은 옷을 찾아 해매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옷에 대한 탐구의 여정은 끝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패션을 보이지 않는 옷이 발견되는 무한한 방식이라 정의해도 좋을 것 같다.

 

옷이 탄생하는 순간에 가시성의 배후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초월의 욕망이 함께 탄생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창세기의 신화가 전하듯 아담이 눈을 뜨고 옷을 입는 순간 그는 신적인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가시적 세계 배후로의 초월을 욕망하는 인간이 되었다. 신적인 자연에 속하는 벌거벗음이 옷으로 가려지는 순간 가시적인 이편과 보이지 않는 저편이 탄생하고, 가려진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영원한 긴장으로서 초월적 욕망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신화가 알려주는 진실은, 옷은 그 탄생의 순간부터 다원론을 존재론적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집어든 마술적인 어떤 열매가, 벌거숭이 자연 한 덩어리를 신의 낙원으로부터 훔쳐다가, 가시적인 형태들 이편의 옷을 입은 인간으로 만듦으로 해서, 이편과 저편이라는 복수적인 항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개안은 세계 안의 가시성을 열어주는 동시에 세계와 세계의 저편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영영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옷을 돌보는 목자로서 패션은 그 본성에서부터 일원론 및 전체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세계 안의 하나의 형식 속에 종속시키려는 장치들, 바로 군복이나 교복 같은 제복에 대해 패션은 숙명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제복은 옷이라기보다는 정치다. 우리가 우상으로서 옷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다수성을 전체성 아래, 본성상 늘어지고 퍼져버리는 고기로서의 신체를 규율적인 형식 아래 종속시키는 제복에서 찾아질 것이다.

 

다원론의 비밀은 무엇인가? 창조에서 추방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바로 우리가 낙원 대신 옷을 선택하고 신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 해서 신과는 다른 항으로서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신과 다른 것임으로 해서 비로소 저편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버린 신의 목소리에 갈증 속에서 귀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은 아닌가? 다원론에 관한 이 신화는 독립적인 항, 즉 자유를 지닌 존재자로서의 인간과 그 독립의 대가로서 가시성의 배후에 대한 꺼지지 않는 욕망을 가지게 된 인간이 저편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그토록 욕망해 마지않는다고 해도 인간이 옷을 벗어버림으로써 다시 잃어버린 낙원의 저 원초적 벌거벗음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낙원의 벌거벗음 아무리 그리워한들 인간은 한번 입은 옷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다. 황제의 새 옷이 마침내 제시하는 투명한 옷, 벌거벗음을 가리지 않는 옷이라는 놀라운 상징의 거울은 벌거벗은 본래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근본적인 욕망과 이제 영영 옷을 벌거벗을 수 없는 근본적인 숙명 사이에서 방황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우울하게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손에는 피할 수 없는 사슬로서, 그리고 동시에 초월의 수단으로서 옷이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대중의 시선을 황홀케 하는 우상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장식 예술이 아닌 진정한 예술로서 패션은 자리가 발견된다. 보이지 않는 옷의 목자인 패션은 가시적 세계 속에 갇힌 인간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저 편, 저 보이지 않는 땅의 지형을 탐색할 수 있게 해주는 별자리로서, 시선들이 길 잃은 양떼처럼 방황하는 벌판마다 환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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